마크스의 산 I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일본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를 최고로 손꼽는 이유는 탈여성적인 이야기와 이야기를 끌어 올리는 강한 문체에 있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틀에 매몰된 세련된 감상적인 글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보다 보다 좀 더 넓은 복잡다단한 세계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와, 작가 자신이 이야기를 휘두를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원고기 천매가 넘는다는 큰 스케일의 <모방범>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의 긴장감과 느슨함을 쥐락펴락하며 사건의 움직임에서 한번도 주눅 든 적이 없다. 사건을 다루는 솜씨는 르포형식의 글처럼 끈질기면서 대담해서 도저히 여성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일단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기존이 내가 알고 있는 여성작가들(그게 외국이든 한국작가이든지 간에)중 누구도 미야베 미유키처럼 어느 사회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암적 덩어리를 세세하게 쪼개 차곡차곡 이야기의 담을 쌓아올린 적이 없었기에, 실로 <모방범>을 읽고 난 후의 충격은 무엇보다도 컸다.   

새롭고 신선한 발견이에는 틀림 없다. 결코 남성작가한테 뒤지지 않는, 여성작가가 쓴 남성적인 상상력과 필력은 같은 여자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난 미야베 미유키를 필적할만한 여성 작가를 만나지 못했고 미야베 미유키를 능가할 만한 여성작가는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오만한 생각은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을 읽고 산산히 부서졌다. 오히려 지금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어느 정도 <마크스의 산>의 영향하에 쓴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크스의 산>은 가녀린 여성작가에게서 나올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나는 멋지다, 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내게 이런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면, 막말로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팔아버려도 괜찮겠다, 싶었다. 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역자 권일영씨가 가오루 여사를 세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손꼽았다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강건하고 힘찬 문체와 단순하지 않는 거대한 이야기 구조. 거대함 속에서 보여지는 세세한 등장 인물간의 갈등과 이해 그리고 이념과 비루한 세속적 욕망등등. 그녀가 최대한 건드릴 수 있는 소재가 이야기 속에 다 녹아있다.  여하튼 그 어떤 남성작가도 당분간은 다카무라 가오루의 이 작품을 뛰어넘을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은 아마 고다 유이치로(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고다와 다른 인물이다)시리즈, 흔히 고다경부 시리즈라고 불리우는 첫번째 소설이다. 그 후의 고다경부는 <석양에 빛나는 감, '94>, <레이디 조커, '98>에 차례로 나왔으며, 다카무라 가오루는는 90년대를 고다 시리즈로 마무리하게 되는데,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손을 떼게 된다. 여전히 드문드문 작품활동을 하긴 하지만 더 이상 쟝르소설에 미련은 없어 보인다.  


거물 다카무라 가오루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책 날개에 소개된 중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크스의 산>의 소설 구성은 6단계로, 1976년 미니알프스산에서 시작된 첫번째 장인 파종은 발아,성장,개화,결실 그리고 수확으로 나누어져 사건의 움직임을 식물의 성장 단계와 일치시키고 있다. 1976년은 사건의 시발점이지만, 본격적인 연쇄살인은 1991년부터 시작된다.  

1991년 10월 5일, 도립대학 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강력 3반 7계에 속한 고다 유이치로는 현장에 출동한다. 피해자는 이제 한물간 야쿠자인 하타케야마 히로시이후 사건은 연쇄 살인사건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남김없이 까발린다.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트릭따윈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독자는 범인이 누구일까,의 긴장감에서 해방되는 대신에 가오루여사는 고다가 범인을 어떻게 찾내는지 그리고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직원들과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범인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심리적인 요인과 묘사에 많은 부분과 맞부닥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지루할만 한데 힘에 넘친다. 강한 문체에서나 볼 수 있는 끌어당기는 힘이 상당하다는 말이다. 서로 연결 될 것 같으면서 중간에 끊어져버리는 등장인물간의 상화연관성이나 지나치게 작위적인 관계의 우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기적으로 촘촘히 짜여진 작품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구멍난 곳곳을 떼울 수 있을만큼 범죄적 상상력은 거대하고(고다의 수사 움직임이 주를 이루지만 그 짝패격으로 마크스의 연쇄살인의 움직임도 도사리고 있다) 그 거대한 상상력을 뒷받침할 만한 건장한 문체가 버티고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굳건하게 다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체만이 그녀의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언뜻 보면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과정과 마크스의 범죄 행위가 주를 이뤄 많은 독자들은 가오루 여사가 다루고자하는 묵직한 이념전쟁에 대해서는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이 작품의 묵직함은 바로 범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오루여사가 이 책을 발간한 당시만해도  사회분위기상 그녀의 이러한 이념 투영은 상당한 용기와 진보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고다의 전처나 처남인 가노가 자유로운 자파색깔의 소유자라는 설정은 일본 전공투의 유산이 아닐까.    

예전에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를 읽을 때만해도 나는 그 책이 미스터리 1위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단 두권으로 끝내기에는 부족한 뭔가가 확실히 있다고 느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책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2대 안조 다미오에서 묘사한 일본내에서의 좌우의 이념 대결은 이 책의 가치를 되짚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포스러울 정도의 레드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격렬한 좌우이념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숫자상 일방적인 우파의 점령이라고 할 만한 70,80년대를 보냈다. 몇 몇의 일본 소설에서 얻은 결과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내 공직사회나 언론은 우파가 점령해 있고 공안 사회였다. 하지만 우파점령국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분열의 틈을 서서히 가른 곳은 자유기고가나 다카무라 가오루 같은 소설가라는 것이다. 글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속에서 이념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오루 여사의 황금을 안고 튀어라를 단순한 이야기구조로 보지 않는다. 그 소설에서도 그녀는 비열한 우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는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을 구입한 것이 아마 4년전인가 5년전 무렵이었을 것이다. 명성만 믿고 구입한 책이었지만, 첫장부터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저위의 그림을 그대로 묘사한,  미니 알프스의 지리적 묘사는 난감할 정도로 읽혀지지 않았다(킹이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소설의 첫문장을 수집한다고. 그만큼 첫문장은 독자를 휘어잡을 수 있는 임팩트가 있어야한다). 일본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는 세밀한 묘사나 지루한 심리묘사보다는 많은 부분 대화로 연결되어 있어 읽히기 쉬운데, 가오루 여사의 <마크스의 산>은 세부적인 묘사로 인해 읽기 곤혹스럽기는 하다. 어느 정도 분량을 넘기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다..  

문득 다카무라 가오루 여사의 소설을 읽고, 나는 남성적//여성적 문장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습고 편가르기의 소산인지 알았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그랬던가. 여자는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어쩜 애시당초 남성적 문장와 여성적 문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수 천년간의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최대한 표출할 수 없었던 시대가 대부분이라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를 가르고 구분하고 변별짓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 작가의 역사가 짧았던만큼, 여성작가가 충분이 자신의 기량을 쌓아올린 수 없었던 것은 기존의 편견, 여성은 남성처럼 쓸 수 없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고 미야베 미유키나 다카무라 가오루의 작품이 남성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편견의 벽을 넘어보자. 미야베 미유키나 가오루 여사가 탈여성화된 문장이니 가녀린 여성으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밑바탕에는 부지불식간에 나 또한 여자는 남성적인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남성적은 작가는 대하소설이나 쓸 수 있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허나 많은 작품을 대할 수록 남성작가에서 나는 속살처럼 부드러운 감성 어린문장을 보았고 여성작가에서는 나는 메마르고 건조한 글을, 이야기를 만났다. 남성적/여성적이라고 구분짓기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작가의 성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우리는 성보다 작가의 넓은 시야, 본질을 꿰뚫을 아는 예리함, 그리고 이야기를 한차원 높게 끌어당길 수 있는 진보적인 사고가 작가 자신의 문학적 본질을 정의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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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do 2010-04-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결국 샀습니다.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지만 무척 기대되어요. 될수있음 이벤트 당첨도 됐으면 하지만 조금밖에 안뽑으니 안뽑히리라 포기했지만요.;

기억의집 2010-04-07 16:45   좋아요 0 | URL
아카도님, 잘 하셨어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실거에요^^
저는 일본의 작가군중 부러운 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여성작가에요. 우리 나라 작가들은 맨날 로맨스타령 아니면 이상한 말만 잔뜩 늘어 놓는데, 애네들은 이야기가 구체적이어서 그런지 대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오루 여사의 석양에 빛나는 감이나 재출간되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이벤트 당첨 되길 바래요. 근데 선물이 뭐예요?

akardo 2010-04-08 01:15   좋아요 0 | URL
일본원서나 포스트잇 둘중 하나예요. ^^ 환율 일년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높아 가격이 부담되는 지금 상황에서 무척 바라는 이벤튼데 워낙 이벤트운이 없어서;;;번역본과 원서 둘다 보면 일본어 공부도 되고 좋겠다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4-08 09:32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공부 대체로 원서로 번역본 놓고 읽는데..이 방법 상당히 도움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