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무슨 글을 쓰고 계신가요? 달변의 투르니에씨에게는 긴 질문이 필요 없다. 김선생이 번역중이라는 <짧은 글, 긴침묵>의 속편에 해당되는 산문집<예찬>, 그리고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펴낸 독서록에 이어지는 또 한 권의 독서록, 이렇게 두 권 분량의 원고를 써 놓았지만 아직 출판은 하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엔 무엇보다 흡혈귀 문제에 심취해 있어요. 그 주제를 가지고 한 권의 소설을 써보려고 말입니다. 아주 결정적인 흡혈귀 소설을요. 모리스 라벨이라는 작곡가는 왈츠곡을 작곡했었죠. 그가 원했던 것은 흔히 있는 왈츠곡들 중 한곡이 아니라 왈츠곡 그 자체였어요. 과연 그 곡이 발표된 이후에는 아무도 왈츠를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죠. 내가 원하는 흡혈귀 소설도 그런 거예요. 부정관사가 아니라 정관사가 붙는 흡혈귀 소설!....(중략).... 그런데 왜 하필이면 <흡혈귀>일까? 나는 그런 주제를 좋아하지도 않으려니와 그것이 딱히 내 정서의 심층을 진동시키지도 않는다 "한국인들도 흡혈귀에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p237). 

꽤 오래 전에 읽은 미셀 투르니에의 산문집인 <짧은 글 긴 침묵>중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정작 미셀 투르니에가 쓴 에세이는 가물가물한데, 김화영 교수가 미셀 투르니에의 집을 찾아가 그와 나눈 대화를 작품 후기처럼 쓴 이 글의 저 대목을 10년 넘게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나 또한 김화영교수처럼 흡혈귀란 존재가 내 정서에 그렇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대목을 읽은 순간, 흡혈귀가 그렇게 흥미로울 수 있는 존재였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미셀 투르니에뿐만 아니라 서양 작가들의 흡혈귀에 대한 반응이 좀 별나다고 생각했었다. 쳇, 타인의 피나 빨아먹어야 살 수 있는 영원불멸의 존재라니. 예나 지금이나 흡혈귀 자체가 얼토당토한 유치찬란한, 게다가 성적인 욕망과 뒤얽힌 신화적 존재라는 생각이 고착돼서 나는 좀처럼 서양작가나 영화인처럼 흡혈귀란 주제가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금까지 뱀파이어가 나오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끽해야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나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니어 닥>같은 영화 몇편 정도. 아, 그리고     

영화<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흡혈귀라는 주제를 능가하는 쟁쟁한 얼굴마담들이 나왔던 영화라 당시에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었던 영화. 혹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나귀님이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리뷰에서 이 책을 "드라큘라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생각해 10여년 정도 외면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뱀파이어란 존재가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며, 이 작품에서 가장 매혹적이었던 것은 5살짜리 소녀의 몸에 갇힌 팜므 파탈 클라우디라는 불멸의 존재였다고 글을 남긴적이 있었다. 차라리 정신도 몸과 함께 5살 소녀로 남아있다면 좋았을 것을. 영화에서 클라우디는 성적인 욕망을 갈망하는 소녀로 나온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성숙할지 몰라도 몸은 7살의 몸이었으니깐. 운명의 저주라고 해야하나. 그땐 잘 몰랐는데, 커스틴 던스틴의 요염하면서도 당돌한 눈빛 연기 굉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갑자기 왜 이렇게 나귀님의 리뷰까지 들먹이느냐하면, 바로 며칠 전에 보고 온 <렛미인>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말이지만, 난 이 영화에 대한 스토리를 전혀 몰랐다. 영화를 보러 가는 도중에 지인과 통화하다가 이 영화가,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뱀파이어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얻어 들었다. 꽈당! 뱀파이어가 나온다는 말에 도중에 갈까말까 볼까말까로 한참을 고민 좀 했었다. 저 위에 쓴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나는 흡혈귀란 캐릭터에 대해 그렇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별로 뭐 흠흠흠.  

여하튼 망설임 끝에 보았다. 그리고 영화 보고 와서, 외톨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이야기 어쩌구저쩌구하며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극찬했다고 하는 글을 읽었는데, 솔직히 그런 평가는 좀 오버다 싶었다. 내 나이쯤 되면 속물근성이 강해져서 저들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데, 내 눈에는 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순수하지도 진실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사랑이 밥 먹여주니!  

나는 이엘리에게서 <뱀파이어의 인터뷰>의 5살짜리 팜므 파탈 소녀 클라우디아를 보았고, 이엘리에게 자신의 피 한방물까지 준 호칸에게서 오스칼의 미래를 보았다. 일단 책은 무시하고, 이엘리는 이백년동안 12세 소녀의 몸 속에 갇혀 있고 어쩌면 미래의 수 백년 후에도 12세의 소녀로 남아있을 것이다(그녀가 자신의 삶에 진저리를 치고 죽음을 선택한다면 달라지겠지만). 그녀가 클라우디와 다른 점은 자신의 욕망을 이용한다는 것. 그녀는 자신의 닫혀있는 몸과 삶 속에서 또 다른 동반자를 유혹해 그들이 삶까지 그녀의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둔다. 어쩌면 호칸도 오스칼처럼 어린 나이에 그녀를 만나 소년의 풋사랑을 느껴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다음엔... 죽지 않고 아니 더 이상 늙지 않는 그녀와의 사랑은 너무나 파멸적이다. 소년기의 사랑이 풋풋한 순진한 사랑일 지 모르겠지만 그(호칸 혹은 오스칼 또는 미래의 남자들)는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청년이 되고 이엘리는 여동생으로, 더 나아가 그가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 그는 소아애자로 그의 욕망을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엘리의 유혹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랑을 가장해 자신의 영원불멸한 삶을 위한 피의 조달자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였을까. 순간 뱀파이어의 영원불멸한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변함없이 되풀이 되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엘리의 몸이 12살로 멈춤 것처럼 오스칼의 삶은 그녀와 함게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삶을 선택하는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뱀파이어인 이엘리는 시지프스처럼 닫혀 있는 원의 세계에서만 머물고 생활하고 달릴 것이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오스칼, 물론 그는 나이를 먹고 늙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삶은 이엘리처럼 더 이상 열려 있는 공간이 아니고 육체도 정신도 더 이상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에게 성장은 이엘리와 함께 12살의 시계에서 멈추었다. 성장이란 함께가 아닌 자기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며 성장이란 결국 궁극적으로 개인 스스로 찾아가는 자유로운 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엔딩 크레딧도 보지 않고 후다닥 나와 버렸다. 소년과 소녀의 행복한 미래가 그려지기 보다 오스칼(아, 왜 그렇게 투명한 느낌이 드는 이쁜 소년이라는 생각이 드는지)의 파멸의 길이 안스러워서 내 피가 다 빠져나갈 것 같았기에.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절대 책은 읽지 말자,라고 다짐하고 나왔다. 더 이상의 파멸을 끌어안고 싶지 않다. 한 소년의 멈추어버린 삶과파멸의 목격은 이제 영화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세상엔 영원한 사랑이란 없단다. 얘야.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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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0-02-21 08:53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영화와 책을 잘 피했구나 싶어요. 슬프고 무섭네요, 이엘리.

기억의집 2010-02-21 12:23   좋아요 0 | URL
진짜 내용 너무 악마적이에요. 게다가 소년애가 얼마나 투명하고 이쁜지.. 그래서 더 맘 아팠던 영화였어요. 그 때 언니랑 통화했을 때가 지하철로 향하던 때였는데, 그냥 발걸음을 돌렸어야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