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좋아하고 있으며 어쩜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해 글자 한자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어도 좋아할 것만 같다. 오랜 시절 나와 함께 있어 준 벗과 같은 책. 책만은 이상하게 바람둥이 기질을 타고 나서 그런지 내 인생의 독서 이력은 그 때 그 때 다르며 좋아하는 작가들도 유행에 따라 따르다. 물론 내 맘속의 영원한 작가들이 몇 몇 있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책이 없던 때라 책을 읽을 만한 곳을 찾아 다니며 세계문학이든 만화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었고 오로지 한국 작가들만 편애했던 스무살 시절도 있었고 현재는 아이들하고 부딪히면서 살아서 그런지 그림책이며 자연과학서적등 잡다한 분야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후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미래의 독서는 미지수로 남아있지만. 

 

며칠 전에 국내도서 칸에 들어가 흝어보다가 오정희 선생의 새책을 발견하였다. 물밀듯 밀려오는 오정희 선생의 문체에 대한, 묘사에 대한 그리움. 불현듯, 아 그렇지, 오정희 선생은 한 때 내 20대때의 여자였지,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언제였는지, 어떤 계기로 그녀의  <바람의 넋>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편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분위기. 해질 녁 초겨울의 바람처럼 차가운 듯한,  텅 빈 쓸쓸한 분위기가 내 몸을 휘감아  미친듯이 그녀의 작품들을 사서 읽은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과 같은 분위기를 타고 느낄 정도로 강한 문장을 가졌으며 그 강인함은 기시감이 형성될 정도(강하다고 해서 남성적 문장이라는 말은 아님!). 이상하게 <바람의 넋>의 줄거리는 십년이 휠씬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만큼 그 소설 속  여주인공의  처절한 트라우마를 강렬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글을 쓰던 분인데, 몇 년전에 선생은 수필집<내 마음의 무늬>에서 글이 더 이상 잘 써지 않는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그 이후로 오정희 선생의 작품은 검색하지 않었고 우리 소설에는 더더욱 관심 가지지 않게 되었다. 공지영씨가 오정희 선생의 작품이 너무 좋아 무작정 춘천으로 기차 타고 떠났을 정도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나 또한 선생의 젊은 시절의 글은 내 20대 시절에 바람의 넋처럼 귓가에 맴돈다.   

 

고등학교 시절, 소설가 양귀자을 알게 된 계기가 <학원>이라는 잡지에 실린 <유황불>이라는 단편이었다. 그 단편소설속의 여주인공 소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애정이 많이 가는 소설이었고 그 애정은 스물 살이 넘어도 식지 않았다.  

양귀자 선생의 <지구를 색칠한 페인트공>은 정확하게 내가 스무살의 겨울 무렵에 나왔던 연작 소설집이었다. 스무 살의 겨울 어느 날, 교보문고에 가서 <지구를 색칠한 페인트공>의 표지를 들취보았다가 내용이 너무 따스하고 훈훈해 사 가지고 왔던 책인데, 연작내용은 동네골목에서 일어날만한 아주 작은 소재의 따스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책은 양귀자 선생이 문지에서 계속 책을 내다가 남편이 따로 독립해서 차린 살림이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해 대박을 터트린 소설로 아는데,  양귀자 선생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가이다. 내가 아는 한 그녀만큼 글을 따스하게 쓰는 작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작품 초기 시절만 해도 가식적으로 사람의 팍팍한 맘을 치유해주는 그런 따스함이나 보듬음이 아니고 문체 자체가 따스했었다. 그런 선생이 변한 것이 그녀의 단편 <곰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건축가가 어떤 집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이제 내 손으로 지어야지 하고 결심한  결심한 <곰 이야기> 이후 선생은 좀 더 돈이 될 수 있는 작품을 연달아 내 놓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돈이 될 수 있는 상품을 내 놓은 게 나쁘다거나 변절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선생만이 가지고 있던 따스한 스토링 텔링이 사라지면서 점점 선생의 작품을 안 사다 읽게 되었다는 것.  

 

푸하! 배수하하면 사과부터 떠오른다. 그녀의 첫 작품집 문지에서 나온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동네 시장의 서점에서 사고 나오면서 옆 과일가게에서 파는 빨간 홍옥을 까만 비닐에 한아름 사 들고 온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난 사과를 그것도 푸른 사과도 부사도 아닌 새빨간 홍옥을 무지 좋아한다. 9월 말쯤 나오기 시작하는 빨간 홍옥을 껍질채 한입 한입 배어 먹은 그 맛이란. 친정엄마는 시다고 질색팔색을 하지만 난 그 짜릿한 신맛이 입안 가득 채울 수 있어 홍옥을 좋아한다. 이 작품을 읽고 그녀의 신끼 있는 작가 사진을 보고 애사롭지 않는 모습에 작품보다 배수아라는 인물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한동안 그녀의 작품을 사 다 읽다가 한동안 그녀가 유학인가 뭔가 가 있는 바람에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요즘 검색해보면 번역도 하고, 소설도 쓰고 하는 것 같던데. 요즘은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직접적으로 5.18을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침묵을 지키며 쉬쉬 거렸다. 왜곡된 모습으로. 십년 정도가 흘러서야 그리고 정치적으로 묶인 매듭이 느슨해지면서 5.18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5.18과 마주 선 작품이 바로 최윤 선생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였다. 상처난 역사의 아픔을 여린 감수성으로 풀어내어 더 감정적으로 다가온 작품. 최규석의 100도시 보다 더 먼저 청소년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소설이다. 불문학 전공자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고 우리의 비어 있는 역사를 채우기 위해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그 때는 그런 생각 못했다. 그냥 이 소설에서 최 윤 선생이 바라 본 5.18의 비극성에 호감(?)이 갔을 뿐이었다. 최윤 선생이 썼던가. 자신의 방의 네 면은 책을 위한 공간이라고. 지금은 뭐하시는지 모르겠다. 이상문학상도 탔던 것으로 아는데, 활동의 폭을  점점 줄어들어 활동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내 경력은 이 소설 하나면 됐다, 싶어 주춤거리고 있는지. 

언제부터인지 점점 우리 소설과는 거리감을 두고 지낸다. 일년에 한 두권 읽으면 많이 읽는 정도. 소설이 짊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혹은 너무 가벼워서 일 수도 있고. 소재나 주제가 매 그 밥에 그 나물이서 질려서 물린 상태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쩜 내 나이가 젊은 처자들의 심오한 세계를 이해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난 좀 새로운 스탈의 글쓰기나 주제를 원하는데 그들이 젊은 혈기임에도 밀리는 것 일수도 있고. 여하튼 내가 물고 늘어질 만한 우리 소설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소설가들이 참신한 기법으로 글을 쓸 일은 만무하고..그리고 그들도 젊은 날처럼 글을 쓰지 않는다(그리고보면,  하루키옹 참 대단하네!). 이제는 우리 소설을 꼭 읽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읽을 책이 산더미 같은데, 이 나이에도 우리 것을 애용하자는 표어는 좀 무리 아니겠는가.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내 맘에 쏘옥 드는 작가 한 명쯤 발견하고 싶은 맘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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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24   좋아요 0 | URL
한국소설이 읽었던게 까마득한 옛날이에요. 언제부터인가 한번 읽어버리면 내용도 잘기억이 나지 않는 일본소설들만 잔뜩 읽고 있어요.

기억의집 2010-04-28 14:53   좋아요 0 | URL
저도요. 한국 소설은 가뭄에 콩 나듯이 사서 읽어요. 전 이상문학상같은 상에 더 열받아서 한국문학은 애시당초 가망이 없다고 접었어요. 지네들끼리 돌려가면서 타 먹는 이상문학상, 자멸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scott 2010-04-28 20: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기네들 끼리 읽고 수상작 결정하나봐요. 대중성이 아닌 문학적 가치 '비문'에 가치를 둔다는데 흠 재미없는건 사실이죠. 기억의 집님 말처럼 자기네들끼리 돌려가며 타고 노벨문학상 후보작 운운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