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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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상상력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과학이든 역사든 소설이든 간에 모든 글쓰기의 시작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중세를 암흑시대로 만든 종교도(신 자체가 상상력의 소산이므로), 코난 도일이 처음 등장한 추리소설도,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빅뱅이론과 같은 과학이론들의 시발점이었다. 한사람의 상상력이 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사로 잡아 믿음이 되어 종교가 되기도 하고 이론적 정설로 자리 잡아 학문이 되기도 하며 발명품이 되어 문명의 이기를 생산해 되기도 하였다. 상상력이 없다면 세상에 변화란 것은 없었을 것이면 변화가 없다면 세상은 유인원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최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서술하는 역사서도 단순한 기록 작업 이상의 그 무엇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사라진 과거의 시간을 더듬는 작업에서 필요한 도구는 현재 남아 있는 문서와 유적 그리고 상상력이다. 과거의 플래쉬백을 터트리기 위해서 역사학자는 문서를 들척이면서 머릿 속에서는 당시의 사람이 되어 그 시대를 고찰하고 객관적이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다. 시오노 나나미가 위대한 역사학자로 자리 매김한 것은 누구나 다 알듯히 그녀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여준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 때 어쩜 나나미의 일상은 반은 20세기를 살고 있는 역사서술가요 반은 기원전 로마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세기를 뛰어넘어 전지적 시점으로 그 시대를 볼 수 있는 그녀의 뛰어난 상상력이 부러웠다.
우연히 들춰 본 <운명의 날>도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 반해 이틀 동안 단숨에 읽은 역사서이다. 이 책에 대해 상상력 운운해서 헷갈리지 모르겠지만 팩션은 아니다. 니콜라스 시라디기라는 건축비평가가 확대경을 꺼내들고 역사의 한 곳을 파헤친 지점은 1755년 11월 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다. 작가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며 리스본 대지진을 객관적으로 조명했는데, 스페인내에서의 개혁세력(카르발류 총리)과 카톨릭 세력과의 권력 투쟁, 지진의 파생이 유럽의 근대화의 불씨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해석은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독특하고 참신한 역사의 재구성이었다.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 몰라했던 당시 왕이었던 주제 1세 앞에, 후세에는 폼발후작이라고 알려진 카르발류가 나타나 수도를 옮기는 대신 리스본을 재건하자고 강력 주장하자 그에게 왕은 그 자리에서 리스본을 재건하기 위한 전권을 주었다. 피달구(지방 유지) 출신인 카르발류가 총리의 신분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의 가문 좋은 집안과의 결혼과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자질 덕에 한단계 한단계 권력의 요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과감하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게 된다. 여하튼 기적적으로 리스본을 재건하기 위해 그가 총리직에 오르자 그를 괴롭힌 것은 지진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카톨릭 구교와의 권력싸움이었고 굶주림과 인구 부족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도시 설계였다. 종교와의 권력 싸움은 그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고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이 절대적인 종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대 지진후, 카르발류의 등장과 리스본 대지진 전후 스페인의 대략적인 역사 배경을 소개하고 있고 우리가 몰랐던 스페인의 역사를 재밌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인 항구의 융성과 노예 시장 그리고 브라질 정복과 왕조의 화려한 삶과 대조적인스페인 민중의 피폐한 삶등. 작가가 상당히 진보적인 시점에서 카르발류의 업적과 스페인 상업의 몰락등을 유대인의 종교 탄압과 연결하여 해석하는데, 그의 뛰어난 상상력이 없었다면 유추해 낼 수 없는 해석이다. 이 책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카르발류의 묘사는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여준 캐릭터의 묘사 못지 않다. 카르발류는 그 시대가 낳은 독재자이면서 시민계몽을 위한 학교 설립과 대학 개혁등, 상당히 자유로운 인물로 정의 하고 있다. 후대에 역사학자들에 의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는데, 사실 민주적 개념조차 없는 시대에 태어나 왕의 권한 대리로 나라를 통치한 사람이기에 그를 독재적 성격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작가는 그의 상반된 평가 모두 지적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의 통치 능력이 오늘 날의 史가들에게 못 마땅 할지라도 저자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카르발류를 능가할 만한 개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주제 1세가 죽자 총리직에서 물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업적은 상반된 평가를 내릴 지언정 역사사가들에 의해 다시 조명되고 발굴될 것 같다.
이 책의 분량은 다른 역사서에 비해 적다. 한 250페이지 정도. 개인적으로 이런 역사서를 좋아한다. 연대순으로 나열된 역사도 가치가 있지만, 어느 한 시점의 흥미로운 사건이 불러 일으켜 이 작가처럼 그 시대를 공부하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처럼 상상하고 그 시대를 해석하는. 이런 역사서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좀 더 넓은 시야와 역사적 안목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이 오독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역사적 관점도 좋지만 부분의 역사 해석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이 책은 몸소 실천하고 있다. 작가의 역사에 대한 열정과 독특한 역사적 해석이 부러운 책이다.
덧 : 이 책은 번역이 무지 매끄럽다. 개인적으로 번역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데, 또 한명의 좋은 번역가를 발굴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