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 제5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이지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라는 엉뚱한 제목의 소설집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 재기발랄한 문장과 뭔가 요즘의 트렌드를 잘 담았다고 할까. 사실 그 책에 수록된 단편에 나온 '사랑은 했지만 사랑받지 못하고, 공부는 했지만 돈은 벌지 못한' 그 여자 캐릭터에 공감을 느꼈단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어쩜, 저를 모델로 하신 건가요, 라고 울쩍거리며 펜레터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등단 작품이라는 이 장편 소설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이 작품으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그녀. 부푼 마음으로 기대를 한가득하며 책을 샀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재밌다고 느꼈던 건 두 가지인데, 먼저 주인공 화자인 이해명. 해명씨는 조선총독부에서 무척 이름이 긴, 도시설계모시기모시기 부서에서 근무하는 모던보이다. 1930년대 경성에서는 아마 '킹카'에 속했던 보이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해명씨의 마음을 한번에 뺏어버린 운명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조연실. 화신상회와 명치정, 단성사를 누비는 둘의 뜨거운 애정행각. 전차를 타고, 인력거를 타고, 혼마치와 종로를 누비는 이들. 이토록 사랑한 두 사람이었지만 연실은 해명을 속이고, 떠나가는데... 나름 잘 나가지만 심약한 청년 해명은 그렇게 떠나간 연실을 찾기위해 인생 일대 최대의 모험과 일탈을 저지른다. 해명이란 캐릭터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는데,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보이지만, 나라 잃은 청춘의 나약함을 보여준다고 할까나. 뭔가 중심을 잃은 거 같은, 엄마에게 매달리듯 연실에게 집착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 안쓰러움과 웃음을 한번에 준다.

또 재밌는 건, 경성 구석구석 거리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금의 을지로와 종로에 있었던 미쓰꼬시 백화점, 화신백화점, 명월관 같은 당시 건물들과 가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경성상계>에 보면 당시 상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정말 저자가 사전에 치밀하게 당시 거리 풍경을 조사한 게 분명할 거 같다. 굉장히 암울했을 것이란 추측만으로 기억하는 그 시대에도, 모던풍으로 무장한 근대 문화들이 경성을 휩쓸고 있었고, 그 속에서 서양식 댄스를 추고, 코-피를 마시고, 그들은 사랑을 했나보다.

해명이 목숨 걸고, 집착하다시피 찾아다니는 묘령의 여인, 조연실. 그녀는 거짓말을 잘하고, 수십 개의 가명을 가진 미스테리한 여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말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거짓말이든, 진심이든 그녀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 "조연실은 남자들이 원하는 걸 해주는 여자"란다. 음, 남자들이 무얼 원하는지 바로 파악하고, 그대로 해준다나 뭐라나.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여자라서 뭐라 상상이 안된다. 이런 대목을 보며 조연실은 좋겠다. 이런 감상평을 날리는 내가 웃긴 걸까. ㅜㅜ

근대화의 광풍,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경성은 분명 살아서 꿈틀거렸다. 그 안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우울함, 그리고 결핍. 그와 같이 밀려온 욕망. 그 욕망은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하고, 세상을 향하기도 한다. 영웅이 되고 싶기도 하고,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애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그렇게 그 욕망들을 쏟아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거리를 가득 채운 그 욕망의 열기들. 아련하기만 하다. 어떻게 그 광풍 속에서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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