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른 알약 - 증보판 ㅣ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평점 :
일로 알게된 프랑스인 사진작가가 있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다. 어젯밤에 종로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전철역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더운 날씨 탓인지 땀을 조금 흘리고 있었는데 붉게 상기된 표정이 몹시 건강해 보였다. 사실 누가 너무 시끄럽게 낯선 말들로 떠들어서 쳐다보았는데 그곳에 그가 한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처음에 나를 보고 누구?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자 역시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다란 배낭을 매고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외모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였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수줍어하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그 미소는 완전한 한국여자의 것이었지만 그녀는 프랑스인이고 한국어는 아주 조금 할 수 있다고 했다. 짧은 영어로 몇마디 얘기를 나눠보니 그녀는 한국계 프랑스인 입양아였고, 현재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살며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했다. 나는 두 사람의 상기된 얼굴과 톤이 높은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낯선 한국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이 부부를 만나고 집으로 오면서 예전에 읽은 이 책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만화의 주인공은 에이즈에 걸린 그녀와 역시 에이즈에 걸린 그녀의 아들과 함께 산다. 얼음판 위를 걸어야하는 것같은 가슴 조마조마한 나날들이고 조심해야할 것들이 많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며 돕고 행복하게 산다.
나는 이 만화를 보면서 '이상적인 관계'-특히나 남녀 사이에서의 관계-에 대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내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가 에이즈 환자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할까. 이런 질문 자체를 아예 나에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라며 상상조차 해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사실 내가 사랑한 남자가 대머리면 어쩌지, 도박을 하면 어쩌지를 걱정하는 일도 드물다. 주인공은 책에서 어느 순간, 그녀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버릴 수 있었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동정심도, 미안함도 모두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일 뿐이다.
현실에서 내가 직접 본 커플과 만화에서 본 커플, 이 두 가지 커플의 사례만 봐도 내가 얼마나 고정관념과 편견에 휩싸인 채 살고 있나,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나는 아직도 현실과 동떨어진 먼나라의 완벽한(?) 타인과의, 이성과의 관계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있는 그대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것. 하지만 이 모든 긍정과 인정은 사랑과 믿음, 배려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기대를 한다. 나와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하지만 문제는 바로 나였을 뿐이다. 너무 삐딱하고 세속적인 나. 내 탓이다. 내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