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 반전을 포함한 책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리 내용을 알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돌아가 주세요.


흔히 로맨스물에서는 여자 주인공은 가난하고 남자 주인공은 부유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이 인연이 되고 운명이 되면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따라 상류사회에 편입하며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이 신데렐라 공식은 그러나 아직도 로맨스물에서는 그 힘을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예외도 있고 정도의 차이도 있지만 변함없는 한 가지, 남자 주인공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변함없이 '평범'보다도 높다는 것이다. 이는 로맨스물 특성상 주된 독자들이 여성이므로 여성들의 바람을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성들이 많이 보는 장르에서는 미모의 매력적인 여성이 주로 나오듯 여성들이 많이 보는 로맨스물에서는 경제력 있고 매력적인 남성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여성들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로맨스물이라는 장르를 통해 드러나고 있지만 과거 6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1954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지푸라기 여자>라는 소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34세의 힐데가르트는 번역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여성으로 어느 날, 억만장자가 신붓감을 찾는다는 신문 공고를 보고 자신의 신분상승을 꿈꾸며 편지를 쓴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야망도 컸던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편지에 숨기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억만장자의 눈에 결국 들게 되고 답장과 함께 온 칸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그가 있는 칸으로 망설임 없이 떠난다. 

여기까지 읽고 든 생각은 로맨스물이구나,였다. 여자 주인공의 야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아직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감정이 없지만 가난한 여자가 부유한 남자를 만나는 보통의 로맨스물의 도입부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부하게 우연을 들먹이는 것보다는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불순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두 남녀 앞에 펼쳐질 삶에는 '사랑'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안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칸에 도착해 그 억만장자를 만나지 못한다. 대신 그의 비서 안톤 코르프를 만나게 되는데, 사실 그 공고는 억만장자가 낸 것이 아니라 그 비서가 늙은 자신의 주인을 속이고 그의 재산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공범이 필요해 낸 것이었다. 그는 힐데가르트에게 자신의 양녀가 되면 그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겠다면서 대신 그가 죽게 되면 그녀가 전 재산을 물러 받게 될 테니 그때 20만 달러를 자신에게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억만장자의 사랑보다 돈이 더 필요했던 그녀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공범이 된다.

달달한 로맨스물을 기대하며 읽어나가던 나에게 한 번의 충격을 안겨주었던 부분이었다. 결국 그들은 한편이 되어 그 늙은 억만장자를 속이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일반 로맨스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계속해서 떡밥을 던짐으로써 로맨스물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게 만든다. 앞으로 만나게 될 억만장자인 늙은 노인과의 로맨스와 60대이나 아직은 젊어 보이는 매혹적인 매력을 가진 비서와의 로맨스를 남겨두는 것이다. 오히려 힐데가르트는 이쯤에서 안톤 코르프에게 관심을 보이기까지 한다. 안톤 코르프 역시 젊고 똑똑한 힐데가르트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더욱 이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결국 힐데가르트는 비서 안톤 코르프의 도움을 받아 성격 고약하고 늙은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의 아내가 된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누구에게나 고약했던 칼은 그녀에게는 상냥했고 그녀는 그동안 누리지 못 했던 유수한 대접을 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마음껏 누린다. 그녀는 남편 칼이 죽지 않은 그 상태로도 만족스러워한다. 비서 안톤 코르프와 미묘한 감정이 계속 오고 가지만 더는 발전하지 않은 채 이야기는 계속 전개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칼은 죽은 채 발견이 된다. 그리고 분위기는 급 바뀐다.

로맨스물을 표방하고 있던 전반부가 칼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그리고 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이 불거지면서 힐데가르트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안톤 코르프의 조언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유언장이 공증 받을 때까지 칼의 죽음을 감추고자 했던 그녀는 결국 용의자로 체포되고 이 소설은 그동안 입고 있던 가짜 옷인 로맨스물을 벗고 진짜 자신의 옷인 추리물로 갈아입니다. 그렇다. 이 소설은 로맨스물처럼 보였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추리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무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그동안 로맨스물이라 생각하고 힐데가르트에게 초점을 맞춰 읽어 오던 나는 그녀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도 모르게 순식간에 덫에 빠진 그녀처럼 나 역시 순식간에 작가가 쳐놓은 덫에 빠진 듯했다.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웠던 힐데가르트의 동맹자 안톤 코르프의 배신은 너무나도 완벽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와 힐데가르트의 대화를 통해 밝혀지던 전모는 소름이 끼쳤다. 안톤 코르프의 말처럼 왜 힐데가르트와 난 그토록 쉽게 그를 믿었을까? 20만 달러만 주면 된다는,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의 말을 말이다. 어쩌면 힐데가르트는 돈에, 나는 로맨스물이라는 겉모습에 눈이 멀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녀가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발버둥 칠수록 덫은 더욱 조여왔고,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게임의 진정한 승자는 처음 게획대로 안톤 코르프가 되었다. 그의 치밀하고도 예리한 계획은 딱딱 들어맞았고 그는 자신의 범죄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억만장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로맨스물을 표방하며 뒷이야기가 예측되던 이 소설은 크게 내 뒤통수 치고는 나에게 KO승을 거두며 끝이 났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책을 덮고도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다. 힐데가르트가 안톤 코르프가 낸 신문 공고를 본 그날, 금요일부터 이미 게임은 시작이 되고 있었음을 나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작가가 이미 처음부터 귀띔을 해줬음에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쉽게 얻어지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톤 코르프의 말처럼 힐데가르트가 신문 공고를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부자를 만난다고 믿었던 때, 아무나 복권에 당첨되고 아무나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꿈을 꾸고 있었던 때(p.229)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꿈을 꾸고 있었던 때인 것이다. 수많은 로맨스물에서나 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던 때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벼락부자 혹은 급격한 신분상승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안톤 코르프처럼 아주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다대한 노력과 지성과 꾀와 주름살과 모욕과 잠 못 드는 밤들이 요구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끔 현실 회피로 로맨스물에 빠져있기도 하고 대리만족으로 빠져있기도 했는데, 당분간은 그러기 힘들 것 같다. 이 소설의 여운이 너무 강하고 충격적이라 어떤 달달한 이야기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생쥐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쥐덫 속에 치즈 한 조각은 넣어주는 법이라던 안톤 코르프의 말이 소름 끼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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