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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첫사랑.
이 단어만큼 복잡한 단어가 또 있을까? 때로는 설렘을, 때로는 아픔을 주는 단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여기, 첫사랑의 설렘은 짧고 아픔은 컸던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그 소녀의 이야기는 이 문구로 시작한다.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나이. 흔히 우리는 그 시절을 사춘기라 부른다. 소녀는 한참 사춘기의 성장통 속에 겨우겨우 자신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소녀의 마음은 외롭고 쓸쓸했지만 얼어붙은 호수가 그렇듯 안전했다. 그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비밀을 간직한 소년. 요즘 아이 같지 않던 소년. 소년은 그런 아이였다. 소녀와 소년은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아주 찰나의 설렘이 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이 이야기는 《호수의 일》이라는 성장소설(혹은 청춘소설) 속 소녀, 소년의 이야기다. 소녀는 호정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은 은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소설은 소녀 호정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호정이는 어릴 적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현재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는 동생 진주와 달리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어린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린 시절 어느 날에는 재산을 날린 호정이 부모님을 원망하며 화나 있던 삼촌과 고모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울고 있던 할머니가 있다. 그날 호정은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일하는 가게에 혼자 찾아간다. 하지만, 돌아온 건 부모님의 냉대였고 그날은 호정에게 아픈 기억이자 혼자만 간직한 비밀이 되었다. 그렇기에 살림이 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된 지금. 호정이는 이방인처럼 가족으로부터 한 발짝 서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어린 시절 상처받았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런 호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친구가 생긴다. 전학생 은기다. 둘은 자연스레 같은 무리가 되어 친구가 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은기를 포함해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봉사활동으로 간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역무원이 은기에게 건네려던 것이 학생증이 아닌 주민등록증이었음을 알게 된 호정은 은기도 자신처럼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호정은 은기에게 묻지 않는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맞냐고. 어쩌다 전학을 오게 되었냐고.
그건 진정으로 외로운 일이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마음을
가졌다는 건.
나는 외롭다는 말보다
그 마음을 먼저 배웠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랬던 것이다.
호정은 알고 있었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마음이 어떤지를. 그래서 쉽게 물을 수 없었다.
호정과 은기는 이날 이후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둘이 만두를 먹으러 갔던 날, 은기도 저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품은 아이라는 것을 확인 한 날. 호정은 그게 슬프고 서러워 결국 은기 앞에서 눈물을 쏟고 만다. 그리고 그런 호정을 위로하듯 은기는 손을 잡아준다.
우리는 그저 손을 잡고 있었고,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란 참 힘이 세구나.
그저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온 마음이 전해지는구나.
따스해지는구나.
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대체.
그렇게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둘은 딱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풋풋하고 예쁜 마음을 키워 나갔다. 학교에 은기의 비밀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로 인해 은기가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름 모를 바이러스나
천박한 호기심 같은 것들은.
은기의 과거를, 아픔을 떠벌리고 조롱하던 아이들은 그저 호기심이었겠지. 은기가 학교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그 아이들에게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정은 은기에게 더 미안하고 은기 손을 잡아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은기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물함 물건도, 타고 다니던 자전거도 그대로 둔 채.
은기를 만나고 균열이 생겼던 얼어붙은 호수와 같던 호정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한다. 가족하고도 친구들 하고도 관계가 엉망이 된 호정은 은기가 없던 때인 다시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몹시 안전했던 때로(p.284) 돌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은기의 자전거를 들고 은기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끝내 은기는 찾지 못하고
호정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호정은 은기에게 하지 못한 말을 전하고자 은기를 계속 찾는다. 그리고 선생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은기를 찾아낸다.
호정은 하고 싶었던 "미안해."라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은기를 잃었음을. 더 이상 은기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없음을.
어떤 일은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나쁜 일만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일도, 사랑한 일도 그저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 눈처럼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눈 내리던 날의 기억마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 밖에도 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말들, 자꾸만 내 마음에 떠오를 말들, 드문드문 떠오르다가 언젠가는 다할 말들.
내 마음에 빈방이 생겼다. 그 때문에 나는 슬플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방에 얼마나 따듯한 시간이 있었는지를.
눈이 내리면 나래가 연락을 하겠지. 창이 큰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는 것도 좋겠다. 조금 울기도 하면서.
오늘이 나의 첫눈이다.
호정은 이제 더는 은기를 만나기 전,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몹시 안전했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무척 슬플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호정은 더는 피하지 않는다. 자신의 호수가 녹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호수의 일》을 읽는 동안 나 역시 호정과 은기를 보며 설레었다가, 아팠다가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페이지에서 봄이 오는 일은 자신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자신의 호수에 봄이 왔음을 받아들이던 호정이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호정에게는 가족과 친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은기도 호정이처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으면 좋은데... 은기도 딱 호정이만큼만 성장통을 앓았기를 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몇 번을 갈아엎고 다시 썼는지 모르겠다. 읽고 들었던 감정들을 모두 토해내기도 하고, 오버랩되던 나의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하다가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결국 호정과 은기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했다.
천박한 호기심.
사람들은 집단 속에 들어가면 너무나 쉽게 이런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은기의 비밀은 그런 식으로 소비될 호기심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부반장 동원이 같은 사람들도 많다는 거. 남의 아픔에 호기심이라는 말로 쉽게 말하는 사람보다 어쩌면 드러내지 않아 모를 뿐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일부러 은기의 비밀은 노출하지 않았다. 궁금하신 분들은 《호수의 일》읽어보시기를!
개인적으로 열변을 토하게 만드는 논쟁거리이기도 한데, 호정이에게 초점을 맞춰 쓴다고 굳이 쓰지 않았다.
첫사랑의 아픔을 겪고 있는 청춘들이
성장의 고통을 너무 크게 겪지 않기를 바라며
호정과 은기의 상처가 지금쯤 완전히 치유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