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해도 좋은 - 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
유재은 지음 / 책과나무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은 책과나무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무용해도 좋은>


잊힌 말들이 있다.

가림빛, 연보랏빛, 무지갯빛이라

부르던 색의 이름들처럼

한때는 분명 존재했으나

지금은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말들.

그 잃어버린 언어 속에서

한 사람이 하루를 꺼내어 쓴다.

무용하다 여겨진 시간들

쓸모 없다고 내버려둔 마음의 잔여들.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며

천천히 되짚는다.

무엇도 버려지지 않았고

조금 늦게 도착했을 뿐이라는 듯이.


📖 책을 읽고 나서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없이 되돌아간다.

한참 전이라 믿었던 장면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의 가장자리를 흔들고

이미 흘러간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숨을 쉬듯 되살아난다.

그날의 냄새, 그날의 목소리 그날의 공기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듯

사람은 때때로 이유 없이 멈춰 서서

그 기억에 발이 묶인다.

잊었다는 말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모든 일은 다른 형태로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


사는 일은 늘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 성취도 없었던 날들이

의외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하루가

실패라고 여겼던 시간이

누군가와의 짧은 대화나

묵묵히 흘러간 계절이

사람의 마음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사실은 사람을 키우고 있었다는 걸

살아가면서 천천히 깨닫게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고 해서 멈춘 것은 아니다.

느린 시간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런 시간의 결을 기록하는 일이다.

한 줄을 적었다가 지우고

다시 덧붙이고

어제의 문장을 되돌아보며

오늘의 마음을 이어 붙인다.

한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낳고

그 끝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의미가 생겨난다.

그건 계획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는 흐름이다.

삶이란 그렇게 쓰여지는 문장들과 닮았다.

어떤 날은 문장이 길게 이어지고

어떤 날은 한 단어로 끝나기도 한다.

그 모든 불균형이 모여

한 사람의 생을 만든다.


무용하다고 불렸던 시간들은

어느새 가장 큰 증거가 된다.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머물렀는지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놓치지 않았는지가 드러난다.

어느 날 문득 그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별 의미 없다고 여겼던 일들이

하나씩 맞물리며

하나의 길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길은 스스로를 이어가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에는 헛된 시간이 없다.

모든 날이 제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 역할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드러난다.

그제서야 알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두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