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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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현대문학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이야기꾼 에세이>


<이야기꾼 에세이>는
세상이 점점 말이 많아질수록
진짜 이야기가 사라져간다고 말하는 책이다.
벤야민은 이야기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신
그 잿더미 속에서도 여전히 피어오르는
언어의 숨결을 더듬는다.
그는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던
인간의 오래된 본능을 믿었고
이야기라는 행위를 삶의 한 방식으로 보았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세상을 견디고
다른 누군가의 말에 기대 하루를 버텨왔다.
그가 남긴 문장은 그런 기억을 되살린다.
사람의 손끝에서, 입에서, 마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말의 생명력.
벤야민은 그것이 인간이 가진
마지막 온기라고 믿었던 듯하다.


📖 책을 읽고 나서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꿔 흐른다.
벤야민이 말한 ‘이야기의 소멸’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낯선 존재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대의 비유일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말보다
그 이야기를 꺼낼 입이 닫혀 있다는
사실이 더 마음이 불편하다.
경험이 사라진 게 아니라
경험을 건네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말의 주인은 여전히 인간이지만
말의 숨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오래된 천을 짜는
직조공의 손끝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반복되는 실의 결 속에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스며 있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세계가 피어난다.
그는 사라진 이야기의 잔해를 수습하는 고고학자처럼
인간의 내면에 묻혀 있던 ‘전달의 감각’을 되살린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그것이 벤야민이었다.

우리가 잃은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체온에 닿는 일이다.
서로의 삶을 내밀하게 나누던
그 오래된 시간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대신 정제된 정보와 효율적인 언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언어가 매끄러워질수록
삶의 표면은 더 거칠어진다.
벤야민의 글은 그 거칠음 속으로
손을 뻗는 일에 가깝다.
그는 세련된 문장이 아닌
살아 있는 문장을 남긴다.
그건 읽히기보다 ‘들리는’ 문장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이야기 기술의 종언’ 속에서
이상한 희망을 본다.
이야기가 죽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다시 그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흙이 갈라진 자리에서 새싹이 돋듯
말이 멈춘 곳에서 새로운 서사가 자라난다.
한 사람의 숨에서 비롯된 언어다.
그는 말의 주체를 인간에게 되돌려주려 했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아주 미세한 떨림
들리지 않아도 존재하는 리듬 같은 것.
벤야민의 글을 읽는다는 건
그런 리듬에 맞춰 자신의 호흡을 되찾는 일이다.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곧 ‘이야기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배운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가장 오래된 숨결이다.

그는 말하지 않고 기록했다.
그 기록 속에서 나는 오래된 이야기꾼의 손끝을 느꼈다.
그 손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곁에서 지금도 천천히 말을 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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