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 - 시장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 비판적 중국 연구의 새로운 시각
이반 프란체스키니.니콜라스 루베르 지음, 하남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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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세계의 일부인가? 서구의 많은 정치 담론과 미디어, 대중의 인식에 따르면 그 대답은 '아니오'로 보인다. (첫 문장)


현 중국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떨까. 나는 중국과 관련된 학과를 나왔는데, 확실히 그때와 지금의 세계적 정서가 다름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중국에 대한 인식은 매 순간 바닥을 치고 있고, 쏟아지는 중국의 거대한 자본에 수많은 업계가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의 위치는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은 정말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일까. 중국인들은 타 국가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아예 다르고 중국 체제는 그렇게나 세계를 역행하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곳일까. 중국은 확실히 특수한 국가이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그걸 너무 부풀리고 확대해석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중을 넘어 혐중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21세기 황화론(黃禍論)이 불 붙듯 붙는 현 시점에서 특히 왜곡 없이 중국을 연구해야 오래된 진영론을 벗어나 더 나은 '공동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어떻게 타자화되고 외부화되고 있을까. 위가 현재 영향력 있는 세 가지 경쟁 프레임이다. 어떤 입장이든 이러한 관점들은 중국을 외부화되고, 분리된 '타자'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을 분리할 수 없는 세계의 일부로 재개념화해야 중국의 발전이 세계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과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동역할을 이해하려면 일정 수준의 특수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화되고 맥락화되지 않은 분석은 피상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p.36)


그렇기에 제안하는 것이 방법론적 접근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이다. 한 지역을 보편화해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상호 참조하여 상대화함으로서 세계를 다원적으로 인식하는 것. 흔히 '중국적'이라고 보이는 문제들이 실제로는 복잡한 역학 관계와 상호 연계의 결과이므로, 세계 속의 중국과 중국 속의 세계를 모두 조명하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당 저서는 이러한 방향 전환을 위해 다각도로 중국을 바라보고자 한다. 중국 노동 체제, 감시 기술로 보는 중국의 사회적 신용 시스템,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과 신장 위구르 지역의 대량 억류 사태의 연관성과 유사성, 기존 서구의 모델을 모방하고 참조한 중국의 새로운 제도 등 중국의 특수함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들도 세계화의 영향을 받고 압박을 받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한가지 사실로 오늘날 중국에서 노동권과 노사 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이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p.67)


예를 들면 중국의 사회적 덤핑,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정말 중국만의 특징인가. 중국이 노동계약법을 발표했을 때 글로벌 자본들은 그 법이 노동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외국 기업들의 중국 신규 투자나 기업 활동 지속을 재고하게 될 것'(57)이라는 압박을 주었다. 노동계에 있어 '바닥으로의 경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중국만이 정말 맞는걸까. 오명을 중국에게만 씌우고 자신은 고고한 척 발을 빼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은 이 사태에 과연 책임이 없을까.



물론 중국은 폐쇄적인 국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확실히 다른 특수성이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감시와 압박은 인권을 강하게 탄압하고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중국을 세계와 똑 떼어내어 살아갈 수 없다.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 세계의 다원적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시기에 근시안적인 관점은 혐중 감정만을 부추기며 무기력함을 학습시킬 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이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근거 없는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폭 넓은 시각으로 중국을 연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이 연구 저서는 그를 위한 첫 걸음이자 방향 제시가 될 것이다.



+ 중국을 둘러싼 논의가 '본질주의'적 프레임과 '그쪽이야말로주의'적 프레임 사이에서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나는 중국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에 대해 깊은 소양은 없지만 저런 시각이 과연 도움이 될까. 배제와 무관심으로 밖에 읽히지 않아 저 관점을 고수하는 측의 주장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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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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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랫동안 딸들에게 자기의 신체에 수치심과 죄의식을 가지도록 가르쳐왔다. 아들들에게는 별 말이 없었던 것 같다. 동시대 미술 작품 속에서 남성들은 거리낌 없이 성기를 드러내며 어깨를 쫙 펴고 있기 때문이다. 비너스 상은 수줍고 다비드 상은 당당하다.


모든 예술은 오롯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회화 안에는 시대적 관점, 사회상, 철학, 인문학 등 많은 것들이 녹아있다. 그러나 작품은 시대를 넘나드는데 보는 사람은 여전히 그때의 관점을 떼어다 현재에 붙인다. 여성 철학자의 시선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왔던 해석을 전복시킨다. 다시 보고, 크게 보고, 함께 보는 이야기는 흔할 수 있는 미술과 관련된 철학 에세이의 틀을 기존의 것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만든다.



더 억울한 것은 이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대체로 메두사를 끔찍한 마녀, 쓰러뜨려야 할 괴물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변신이라는 형벌을 받았어도 아라크네는 거미로 변하는 데서 끝나는데, 메두사는 남성 영웅 서사의 사악한 조연으로 재차 끌려 나와 소비된다. 죄 없는 여인을 결국 영웅의 앞길을 가로막는 마녀로 만들어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아테나의 저주를 받은 뒤 메두사는 아무도 오지 못하는 곳으로 은둔하지만, 세상은 기어코 그녀를 끌어내어 참수시키는 데 성공한다.



현대 여혐 프레이밍의 집약을 보는 듯한 메두사의 이야기.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이게 남자 잘못인데도) 성별 불문 커다란 비난의 표적이 되고, 피해자는 숨어들어가지만 세상은 다시 끌어내서 참수한 뒤 그 비참한 마지막까지 공표해야 만족한다. 남성이 저지른 범죄 피해자가 '정의로운' 영웅(남성)에 의해 처벌되고 세상에 어떠한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마치 현재의 '참교육' 감성을 보는 듯한 역겨움.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그리고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시간인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 개념이고, 카이로스는 각자의 생에서 의미가 깊은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가장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부분은 그리스인의 시간 관념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카이로스는 흔히 앞머리는 풍성하고 뒷머리는 달걀마냥 매끈한 '아갓쒸는 모르시겠죠'스럽게 앞뒤 헤어스타일이 다른 형태로 그려지는데 지나가버린 기회는 다시 잡기 힘들다는 뜻이다. 보통은 그러므로 기회가 왔을 때 머리채를 잡아야한다, 그러기 위해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한다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글을 많이 보아왔는데, 저자는 저 머리채가 '정말 카이로스의 머리채인지, 아니면 잡으면 다치는 귀신 머리채인지'(104) 알 수 없으니 매 순간 나에게 솔직하고 작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이야기에서 그친다. 나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좋다. 내가 흘려보낸 모든 기회가 카이로스의 뒷통수로만 보여 계속 마음에서 붙잡고 놓아주지를 못했는데, 혹시 알겠는가. 카이로스가 아니라 잡으면 안되는 머리였을지도 모르니까. 후회로 점철되었던 나의 선택이 그 순간의 내 솔직함과 삶의 서사가 반영된, 최선을 생각했던 결정이었다면 그것은 나의 기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뻔하다면 뻔한 말들이고, 그렇게까지 특별한 다정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웠으나 이 큐레이터의 설명은 미술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끔하고 청자에게 건네는 다정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미술은 흔히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해석하는 사람 역시 그 시대적 관점만을 설명해준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너무나 낡고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그때의 것이니까'라는 말은 무적의 방패처럼 더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차단한다. 그러나 이 '철학자 언니의 미술관'은 조금 다른 시선을 알려준다. 여성에게 씌워진 불합리한 프레임과 차별적인 서사, 그렇게 답답하지만 조금씩 나아져가는 그림들을 같이 보여준다. '마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차차 '탐구하는 여성'으로 몇년에 걸쳐 변해간 그림 속의 키르케처럼. 언니이자 엄마의 마음으로 미래를 살아갈 딸들의 발걸음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구성한 이 미술관은 그래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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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함께 서쪽으로
린다 러틀리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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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니켈은 20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첫 문장)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모래 폭풍으로 가족을 잃은 우디 앞에 두 마리 기린이 나타난다. 두 마리 기린을 태운 트럭이 캘리포니아로 향한다는 말을 들은 우디는 무작정 트럭을 쫓아 나선다. 거짓말을 섞은 임기응변으로 트럭 운전사 자리를 따낸 우디와 기린 이송의 책임자 라일리 존스 영감, 기린 트럭을 따라오는 붉은 머리의 사진 기자 오거스타 이렇게 세 명과 기린 '걸', '보이' 두 마리의 여정 속에서 몸과 마음이 둘 다 가난했던 우디는 많은 것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동물의 눈을 똑바로 마주해본 적이 있는지?  길들여진 동물의 시선은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려고 한다. (···) 하지만 기린의 시선은 달랐다. 두려움도, 그 어떤 의도도 없어 보였다. (p.42)


이 셋이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돈벌이 목적으로 기린을 훔쳐가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건넨 돈에 현혹되는 우디 자신, 그리고 고향을 떠날 때 마음에 묻어둔 비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도록 종용하는 내면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야기는 '기린과 함께 하는 여유롭고 행복한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우디라는 캐릭터에 정이 잘 안가서 혼났다. 아무리 고아이며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지만 애가 너무 야생 동물 같다(절도 전과가 쌓여간다. 이 정도면 상습범이다). 도덕이나 사회적 약속에 대한 고민보다 첫 눈에 반한 오거스타에 대한 고민이 더 깊고 자기의 의무보다 오거스타의 부탁을 더 무겁게 계산하는 거 같아서... 우디가 오거스타에게 어쩔 줄 모를 때마다 뒤에서 라일리 존스 영감이 되어 나도 같이 머리를 뜯게 됨. 결론적으로 오거스타가 괜찮은 사람이어서 다행이지 만약 길거리에서 무수히 만나왔던 악인들과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진짜 어쩔 뻔 했냐 이 철없는 것아 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꾹꾹 눌러가며 봤다.


가난한 영혼이 비참한 삶 속에서 처음으로 약간의 은총을 받았을 때, 그것도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사람에게서 그런 은총을 받았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인정하기마저 어렵고, 신뢰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p.316)



우디는 기린의 무구한 눈망울과 사람들의 이해와 용서, 포용 속에서 서서히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회피했던 감정을 직면하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 단정할 수 없고 무수히 많은 길을 걷다가 몇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해서 삶이 전부 망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우디가 기린과 함께 향한 길은 물리적인 길이자 비밀로 묻어놓았던 그날 멈춰버린 우디가 성장할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하는 여정이다.


해당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아마존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고 한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밀려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도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린의 눈망울 같은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 읽고 진짜 기린 멸종돼..?ㅠㅠ하고 찾아봄 기린 멸종위기종이어써....


한 사람이 자란 곳은 영원한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잊혀도 기억되는 곳. 그곳이 나에게 좋았든 안 좋았든 상관없이, 심지어 나를 거의 죽일 뻔했더라도. (p.341)

어떤 것들은 너무 나 혼자만의 것이어서 내 안에만 간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502)

나는 마음으로는 가고 싶었지만 몸이 지쳐 동물원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는 내 마음도 지쳐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장 잔인한 속임수를 쓴다. 심지어 몸이 가장 소중하게 지닌 기억조차, 너무 오래 틀어 긁힌 레코드판처럼 소리도 거의 내지 않게 되고, 분노조차 덜해진다. (p.503)

즐거움에 몸을 흔드는 기린, 곡선을 그리며 여행하는 새,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숲이 없는 세상은 먼지 폭풍 아니면 바퀴벌레, 그리고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나 어울리는 추하고 황량하며 영혼 없는 장소일 뿐이다.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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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따는 사람들 서사원 영미 소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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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가 행방불명 되던 날, 흑파리들은 유난히 배가 고파 보였다. (첫 문장)


한 원주민 가족이 있다. 캐나다에 살던 그들은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주로 국경을 넘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네 살배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부모님과 4명의 남매들은 루시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또 다른 가족이 있다. 미국 메인주에서 외동딸 노마와 함께 사는 부유한 부부. 노마는 계속 이상함을 느낀다. 부모님은 백인인데 자신의 피부는 거뭇하고, 밤마다 꾸는 꿈에서 들리는 '루시' 라는 이름. 하지만 모든 어른들이 한마음으로 노마의 위화감을 부정한다.



두께를 보고 3일 정도로 나눠서 읽으려 했는데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게 책을 펴자마자 첫 챕터에서 애기가 없어졌어, 근데 다음 챕터에 그 애기가 나와, 백인 부부가 걔를 유괴한 거 같음. 스릴러나 추리소설이 아니라서 초장부터 내막이 나온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표지와 제목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라 안타깝고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루시는 언제 돌아오나.


우리가 주로 생필품을 구하러 가는 상점에서 만나는 백인들은 원주민 피는 어쩐지 신맛이 나서 흑파리들이 물지 않는다고, 그래서 블루베리 따는 일에 적격이라고 했다. (p.19)


이야기를 보다 보면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백인은 원주민의 정체성을 지우려 하고, 쉽게 착취하고, 아이마저 빼앗아간다. 갈 곳 잃은 분노와 가족의 상실로 인한 절망 속에서도 원주민들은 잊지 않으려 한다. 엄마가 루시의 작은 신발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던 것처럼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외력으로 기억이 잊혔어도 영혼이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퍼즐조각이 된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삶에 힌트를 숨겨 길을 만들어낸다. 

그에 비해 원주민 가족의 삶을 파괴한 백인의 말로는 망각으로 끝난다. 피해자들은 기억하고 살아가는데 가해한 측은 망각하며 죽어가는 대비가 서사 후반부터 극에 달한다.



"아니야. 백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에게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했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하지만 이젠 알았으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느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개자식들이 승리하게 둘 순 없어. 빼앗긴 걸 되찾아야 해. 우리 모두 그래야 해. 그리고 그건 '피테웨이'(pitewey, 미크마크 원주민들의 언어) 가 '차'를 의미한다는 걸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p.393)


조와 노마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분노에 사로잡힌 조의 이야기보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노마의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애초에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나 자기 연민에 빠진 조가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이런 탕아마저 용서하고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만 '너무 미안해서 그랬다'로는 납득되지 않는 행동들이 있어서, 오히려 노마의 이야기를 더 길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처음에는 조의 시점으로만 서술되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노마가 집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이야기나 엄마의 과잉보호를 읽고 있으면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 같기도 하다구... 이 쪽이 훨씬 재밌다구...



기구하다면 기구한 원주민 가족들의 삶을 보면서 슬픔을 기억한다는 것,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평안함을 찾을 수 있으리란 작은 위로가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모든 일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슬픔은 때로 너무 커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차차 나아져서 유용한 것으로 성장한다. (p.243)


+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무슨 '어제 마트에서 생선을 세일하더라' 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그날 00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갑자기 징조 없이 죽음이 나와버림. 심지어 장면도 안 보여준다. 원주민의 삶과 죽음이란 너무나 가까워서 그다지 유별난 게 아닌 것 같기도 해 약간 슬펐음.


++ 인생 모른다고 생각한 부분이 어머니가 신을 저주했던 날의 사건으로 인해 간절히 기도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준다는 말도 생각나기도 하고. 


"조, 어떤 사람들한테는 세상의 관대함이 필요하단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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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오랑 라면소설 2
하유지 지음 / 뜨인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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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몸통에 점점이 박힌 얼룩무늬, 뾰족한 귀, 밝은 빛에 동공이 좁아진 눈, 그러니까 나는, 고양이다. (p.5)

 

뜨인돌 출판사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라면소설] 시리즈는 라면처럼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고 맛있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청소년 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만약 ~라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들, 『내 이름은 오랑』은 흔하다면 흔한 '고양이와 몸이 바뀌었는데 내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렸다면' 에서 출발한다.

독특한 설정이 아님에도 이런 이야기가 보이면 집어 들게 되는 이유는 고양이가 너무 귀여우니까...(표지도 귀여우니까...저 위로 솟은 귀여운 꼬리와 솜방망이)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처럼 고양이가 되어버린 학생. 내가 분명 고양이가 아니었다는 건 알지만 이름도, 부모님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반대편도 난리가 났다. 학생이 된 고양이는 원래 학생이 좋아하던 귤은 싫어하고, 입에 대지도 않던 생선을 먹기 시작한다.

  

  

짧고 가볍게 읽히는 소설 자체가 목적이라면 목적에 다분히 걸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읽기에는 너무나 얕고, 묵직하게 좋은 여운을 주는 다른 청소년 소설에 비해서는 확실히 가볍다.

보통 무언가와 몸이 바뀌었다는 주제를 내세운 이야기에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성, 타인의 삶에 대한 체험과 깨달음인데

『내 이름은 오랑』은 고양이의 삶과 사람, 특히 중학생의 삶 자체만을 가벼이 비교하는데서 그친다.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나오지만 그저 주변인 정도이고, 핵심은 고양이와 인간의 삶에는 이런 차이가 있는데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듯하다.

 

 

청소년, 특히 책을 거의 접하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가볍게 자극하며 쉽게 발걸음을 떼도록 하는 데에 있어서는 좋은 시리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라면같은 소설이다. 빠르고 가볍고 영양가는 조금 부족하지만 먹는 동안 맛있었고 즐거운 기분. 큰 여운이 남지는 않더라도 즐겁게 읽은 감정이 남는 경험에서 아이들은 독서의 첫출발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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