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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과 함께 서쪽으로
린다 러틀리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평점 :

우드로 윌슨 니켈은 20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첫 문장)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모래 폭풍으로 가족을 잃은 우디 앞에 두 마리 기린이 나타난다. 두 마리 기린을 태운 트럭이 캘리포니아로 향한다는 말을 들은 우디는 무작정 트럭을 쫓아 나선다. 거짓말을 섞은 임기응변으로 트럭 운전사 자리를 따낸 우디와 기린 이송의 책임자 라일리 존스 영감, 기린 트럭을 따라오는 붉은 머리의 사진 기자 오거스타 이렇게 세 명과 기린 '걸', '보이' 두 마리의 여정 속에서 몸과 마음이 둘 다 가난했던 우디는 많은 것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동물의 눈을 똑바로 마주해본 적이 있는지? 길들여진 동물의 시선은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려고 한다. (···) 하지만 기린의 시선은 달랐다. 두려움도, 그 어떤 의도도 없어 보였다. (p.42)
이 셋이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돈벌이 목적으로 기린을 훔쳐가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건넨 돈에 현혹되는 우디 자신, 그리고 고향을 떠날 때 마음에 묻어둔 비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도록 종용하는 내면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야기는 '기린과 함께 하는 여유롭고 행복한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우디라는 캐릭터에 정이 잘 안가서 혼났다. 아무리 고아이며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지만 애가 너무 야생 동물 같다(절도 전과가 쌓여간다. 이 정도면 상습범이다). 도덕이나 사회적 약속에 대한 고민보다 첫 눈에 반한 오거스타에 대한 고민이 더 깊고 자기의 의무보다 오거스타의 부탁을 더 무겁게 계산하는 거 같아서... 우디가 오거스타에게 어쩔 줄 모를 때마다 뒤에서 라일리 존스 영감이 되어 나도 같이 머리를 뜯게 됨. 결론적으로 오거스타가 괜찮은 사람이어서 다행이지 만약 길거리에서 무수히 만나왔던 악인들과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진짜 어쩔 뻔 했냐 이 철없는 것아 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꾹꾹 눌러가며 봤다.
가난한 영혼이 비참한 삶 속에서 처음으로 약간의 은총을 받았을 때, 그것도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사람에게서 그런 은총을 받았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인정하기마저 어렵고, 신뢰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p.316)
우디는 기린의 무구한 눈망울과 사람들의 이해와 용서, 포용 속에서 서서히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회피했던 감정을 직면하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옳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 단정할 수 없고 무수히 많은 길을 걷다가 몇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해서 삶이 전부 망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우디가 기린과 함께 향한 길은 물리적인 길이자 비밀로 묻어놓았던 그날 멈춰버린 우디가 성장할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하는 여정이다.
해당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아마존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고 한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밀려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도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린의 눈망울 같은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 읽고 진짜 기린 멸종돼..?ㅠㅠ하고 찾아봄 기린 멸종위기종이어써....
한 사람이 자란 곳은 영원한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잊혀도 기억되는 곳. 그곳이 나에게 좋았든 안 좋았든 상관없이, 심지어 나를 거의 죽일 뻔했더라도. (p.341)
어떤 것들은 너무 나 혼자만의 것이어서 내 안에만 간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502)
나는 마음으로는 가고 싶었지만 몸이 지쳐 동물원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는 내 마음도 지쳐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장 잔인한 속임수를 쓴다. 심지어 몸이 가장 소중하게 지닌 기억조차, 너무 오래 틀어 긁힌 레코드판처럼 소리도 거의 내지 않게 되고, 분노조차 덜해진다. (p.503)
즐거움에 몸을 흔드는 기린, 곡선을 그리며 여행하는 새,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숲이 없는 세상은 먼지 폭풍 아니면 바퀴벌레, 그리고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나 어울리는 추하고 황량하며 영혼 없는 장소일 뿐이다. (p.505)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