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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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랫동안 딸들에게 자기의 신체에 수치심과 죄의식을 가지도록 가르쳐왔다. 아들들에게는 별 말이 없었던 것 같다. 동시대 미술 작품 속에서 남성들은 거리낌 없이 성기를 드러내며 어깨를 쫙 펴고 있기 때문이다. 비너스 상은 수줍고 다비드 상은 당당하다.


모든 예술은 오롯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회화 안에는 시대적 관점, 사회상, 철학, 인문학 등 많은 것들이 녹아있다. 그러나 작품은 시대를 넘나드는데 보는 사람은 여전히 그때의 관점을 떼어다 현재에 붙인다. 여성 철학자의 시선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왔던 해석을 전복시킨다. 다시 보고, 크게 보고, 함께 보는 이야기는 흔할 수 있는 미술과 관련된 철학 에세이의 틀을 기존의 것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만든다.



더 억울한 것은 이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우리는 대체로 메두사를 끔찍한 마녀, 쓰러뜨려야 할 괴물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변신이라는 형벌을 받았어도 아라크네는 거미로 변하는 데서 끝나는데, 메두사는 남성 영웅 서사의 사악한 조연으로 재차 끌려 나와 소비된다. 죄 없는 여인을 결국 영웅의 앞길을 가로막는 마녀로 만들어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아테나의 저주를 받은 뒤 메두사는 아무도 오지 못하는 곳으로 은둔하지만, 세상은 기어코 그녀를 끌어내어 참수시키는 데 성공한다.



현대 여혐 프레이밍의 집약을 보는 듯한 메두사의 이야기.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이게 남자 잘못인데도) 성별 불문 커다란 비난의 표적이 되고, 피해자는 숨어들어가지만 세상은 다시 끌어내서 참수한 뒤 그 비참한 마지막까지 공표해야 만족한다. 남성이 저지른 범죄 피해자가 '정의로운' 영웅(남성)에 의해 처벌되고 세상에 어떠한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마치 현재의 '참교육' 감성을 보는 듯한 역겨움.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그리고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시간인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 개념이고, 카이로스는 각자의 생에서 의미가 깊은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가장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부분은 그리스인의 시간 관념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카이로스는 흔히 앞머리는 풍성하고 뒷머리는 달걀마냥 매끈한 '아갓쒸는 모르시겠죠'스럽게 앞뒤 헤어스타일이 다른 형태로 그려지는데 지나가버린 기회는 다시 잡기 힘들다는 뜻이다. 보통은 그러므로 기회가 왔을 때 머리채를 잡아야한다, 그러기 위해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한다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글을 많이 보아왔는데, 저자는 저 머리채가 '정말 카이로스의 머리채인지, 아니면 잡으면 다치는 귀신 머리채인지'(104) 알 수 없으니 매 순간 나에게 솔직하고 작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이야기에서 그친다. 나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좋다. 내가 흘려보낸 모든 기회가 카이로스의 뒷통수로만 보여 계속 마음에서 붙잡고 놓아주지를 못했는데, 혹시 알겠는가. 카이로스가 아니라 잡으면 안되는 머리였을지도 모르니까. 후회로 점철되었던 나의 선택이 그 순간의 내 솔직함과 삶의 서사가 반영된, 최선을 생각했던 결정이었다면 그것은 나의 기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뻔하다면 뻔한 말들이고, 그렇게까지 특별한 다정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웠으나 이 큐레이터의 설명은 미술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끔하고 청자에게 건네는 다정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미술은 흔히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해석하는 사람 역시 그 시대적 관점만을 설명해준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너무나 낡고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그때의 것이니까'라는 말은 무적의 방패처럼 더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차단한다. 그러나 이 '철학자 언니의 미술관'은 조금 다른 시선을 알려준다. 여성에게 씌워진 불합리한 프레임과 차별적인 서사, 그렇게 답답하지만 조금씩 나아져가는 그림들을 같이 보여준다. '마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차차 '탐구하는 여성'으로 몇년에 걸쳐 변해간 그림 속의 키르케처럼. 언니이자 엄마의 마음으로 미래를 살아갈 딸들의 발걸음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구성한 이 미술관은 그래서 특별하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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