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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평점 :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내고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첫 문장)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데, 그냥 맛이 없기 때문이다. 술 마실 바에는 커피를 더 먹지. 대학 신입생 때는 멍청하게도 잘 마시는 게 좋은 건 줄 알고 선배들이 주는 술을 족족 받아마시면서 예쁨 받는 게 무슨 삶의 목표인 사람 마냥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량이 약하지는 않아서 큰 사고 없이 잘 먹었고, 그 덕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평생 먹을 술 대학 다닐 동안 다 마신 것 같다. 지금은 몸에도 안 좋은 거 맛까지 없어서 안 먹지만.
그런데 갑자기 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느 날부터 드라마, 예능에서 우후죽순으로 대놓고 튀어나왔다. 그게 있어야만 시원한 대화가 된다는 듯,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는 낭만의 한순간이 된다는 듯. 그런 이야기들이 술을 다루는 방법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진심을 끄집어내기', '긴장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즉,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체로 이렇게 취하고 저렇게 구르고 술을 병나발로 불면서.
하지만 그렇게 맛난 홍어도 술 없이 먹으라 하면 화가 벌컥 난다.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낫다. 북청 물장수의 숫자관념이 '통'과 '냥'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 술꾼의 미각도 안주 아닌 음식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p.8)
술 대신 커피라는 입장을 가진 측에서 술이 부러운 것은 단 하나이다. 안주의 다양성. 술안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만두, 탕, 전 심지어 치즈와 빵까지. 그러나 커피는? 만두와 아메리카노...? 어묵탕에 카페라떼...? 이런 부분이 아쉬워서 자꾸 술과 관련된 산문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 같다. 와중에 이 책을 보게 되었고, 목차가 정확히 술꾼이 아닌 내 취향에도 맞았다. 술보다 안주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야기. 특히 입이 짧은 권여선 작가가 소주와 함께 하는 안주로 입맛을 키워왔다는 부분은 부럽기만 하다. 소주를 잘 마시면 저자처럼 삭힌 홍어도 먹을 수 있게 될까. (하지만 소주든 사케든 정말 맛을 모르겠다...)
삐득삐득 고등어 중 한 마리는 바작바작 굽고 한 마리는 감자 깔고 떙초 넣은 양념에 맵게 조렸다. 생선을 말리면 살이 단단해지고 깊은 맛이 난다. 뜨거운 밥 한술에 구운 고등어 살을 뜯어 먹는 맛은 기름지고 고소하고, 소주 한 모금에 땡초 곁들여 조린 고등어 살을 먹는 맛은 배릿하고 칼칼하다. (p.200)
술꾼을 자처하는 작가의 산문은 소탈하다. 여러 안주에 곁들인 이야기에서는 훈기가 가득한 사람 냄새가 난다. 술에 대한 산문이라 환한 마음으로 즐겁게 썼다는 글들에서는 읽기만 해도 입맛이 싹 도는 메뉴들이 가득하다. 프로슈토, 카프레제, 브루스케타 이런 해리포터 주문 같은 음식보다 냄비국수, 감자탕, 고등어, 부침개 같이 아는 맛이라 먹지 않아도 맛과 향이 감도는 안주들이다.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은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뉴판' 그 자체이다. 만일 내가 술을 즐겼고, 조금의 요리 솜씨만 가지고 있었다면 매일 그날의 안주에 맞춰 먹으면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첫날에는 순대, 둘째 날에는 만두, 셋째 날에는 김밥.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인데도 안주가 먹고 싶어서 술을 당기게 하는 글을 보자니 작가님은 진짜 술꾼이 맞구나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영업은 이거 좋다고 좋다고 남 붙들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엄청 맛있게 먹고 있으면 주위에서 알아서 영업당하는 거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술꾼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진짜 술꾼이 아닐까. 제철 따라 안주를 찾고, 모든 음식에 어울리는 술을 찾는 낭만이 있는 사람.
+ 맛있는 술은 마신다. 과일 소주나 스파클링 와인 같은.
각자의 혀에는 각자가 먹고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혀의 개성은 절대적이며, 그 개성은 평균적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p.136)
봄에 싹텄던 것들은 여름에 왕성히 자라 마침내 가을이면 완숙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맛에 있어서만은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절정은 단맛으로 표현된다. 모든 먹을거리들은 가을에 가장 달콤해진다. (p.143)
음식은 위기와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화해와 위안을 주기도 한다. 한 식구食口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p.170)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