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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평점 :

'여자의 상처가 폭발할 때 비유는 필요 없다.' 라는 김혜순 시인의 추천사. 정확히 그대로의 작품이다.
13개의 단편 전부 한꺼풀의 포장지조차 없는 날 것이며 냄새가 나고 대담하다. 소설이 아니라 어떤 아이의 삶을 그려낸 다큐와 같기도 하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막히고 타인의 간섭을 배제하는 공간, 신성시되며 지극히 사적으로 여겨지므로 누구도 들여다 볼 생각조차 안 했던 그 공간 속의 비릿한 폭력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단편 내내 대체로 성적 폭력이 잔혹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가장 약한 자인 여성의 몸은 쉽게 침범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창녀라는 프레임을 씌워가며 너무도 쉬이 파괴된다.
폭력의 객체는 여성이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는 성별 불문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대물림 되는 폭력의 끝은 쉽게 그 곳의 가장 약한 자인 여성을 향한다. 약자인 여성도 더욱 약한 자인 여성을 그저 바라본다. 혹은 폭력을 휘두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습된 무기력이며 아버지(남자)를 꼭대기에 둔 가부장적 구조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폭력을 휘둘러야하는 이유는 수만가지가 생겨나는데 그 누구도 그것을 멈춰야하는 이유는 찾지 않는다.
막을 자가 아무도 없으면 사람들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살갗이 찢긴 자국들을 보며, 방어할 수 없는 이에게는 잔인함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p.126, 『상중喪中』)
그리셀다 아주머니의 집은 이 단편집이 그려내는 폭력 그 자체의 공간이다. (『그리셀다』) 예쁘고 반짝거리고 미키 마우스 모양,인형 모양, 곰돌이 푸 모양의 케이크가 있는 마술같은 그리셀다 아주머니의 집. 보기에는 아름답고 좋은 공간이지만 코 끝에는 오래 묵은 냄새가 난다. 먼지 냄새가 자욱하다. 사람의 눈은 블라인드로 내려 가릴 수 있고(『블라인드』), 예쁜 케이크로 현혹시킬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썩어가는 냄새는 숨길 수 없다. 밖에서 멀쩡해보여도 그 은밀한 내면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p.33, 『괴물) 하는 공간. 깨고 나면 그만인 악몽이 아니라 깨어서 더 선명하고,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는 집.
우리는 역겨운 것, 구역질 나게 하는 것, 더러운 것을 혐오하고 보기 싫어한다. 작가는 감추어진 폭력을 드러내는 현장에 사람들이 가장 보기 싫어하는 배설물이라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p.208, 옮긴이의 말)
종교 역시 사방이 막힌 가정과 같이 은밀한 폭력의 장이자, 여성 착취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주체가 된다. 여성은 그 안에서도 외면당하고 가장 신과 가깝다는 이 역시 남성을 위해 여성의 고통에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 허울 뿐인 기도는 어느 여성도 구원하지 못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 그 자체같은 자비와 함께 자신의 죄책감을 놓고 간 성스러운 남자(예수)는 여성만 남음으로서 자유를 찾은 집 안에 다시 남자를 부활시켜 돌려보낸다. (『상중喪中』)
작가는 대담하며 솔직하다. 어떠한 꾸밈과 비유가 없다. 가장 아래에서 가장 강한 자를 향해 소리를 낸다. 그 메시지를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이야기를 모른다 할지라도, 결국 작가가 하고싶은 말은 전달이 된다. 아는 이에게는 고정관념이 이중으로 깨지는 경험을 하게 하고.
나는 대담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가장 약한 자가 권력 최상층에 그저 몸으로 밀고나가 부딪히는 것을 좋아한다. 어떠한 비상구 없이, 안전장치 없이. 그 날것같은 외침, 더러운 자의 손에서 벗겨지는 고상한 자의 향기로운 베일과 그 안의 오물들이 드러나는 순간. 그리고 이 책은 정말로 그 자체의 책이다. 매 단편이 이 작가가 쓰는 마지막 이야기인 마냥 그 안에 절제와 망설임은 없다. 이야기의 힘이 강해서 읽는 중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하는 책이다.
+ 진짜 너무 좋은 책이다. 너무너무. 어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한바가지로 쏟아지는 데 어떤 충격적인 책은 읽고 나면 사고를 정지시킨다. 『투계』는 그런 책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