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사회 - 안전한 삶을 위해 알아야 할 범죄의 모든 것
정재민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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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범죄로부터 안전한가.
매일같이 새로운 범죄 기사를 접하고 무차별 범죄가 늘고 있는 요즘, 경찰의 범인 검거율이 높고 절대적인 범죄량이 줄고있다 하여 쉽사리 불안감을 떨치기는 힘든 세상이 되었다. 무차별 범죄가 늘었다 함은 범죄의 절대량을 떠나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것이며, 나의 부주의와는 관계 없이 일상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게다가 범죄에 대한 처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점차 사법부와의 심리적 거리를 벌렸고 그 불신은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넓어져 각박한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회가 하나의 몸이라면 사회 문제들은 범죄라는 상처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범죄 추리소설의 인기가 높은데 그 이유는 범죄를 사회 수준의 척도로 삼아 이 사회가 이대로 좋은가 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p.16)

「알쓸범잡」 출연으로 대중에게 익숙한 정재민 심의관(현재는 변호사)은 이 책을 통해 범죄로 볼 수 있는 한국 사회를 '판사'이자 입법 실무를 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판사의 형량은 왜 낮은지, 교도소 환경에 대한 이야기와 범죄 예방 시스템 그리고 심의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기에 쓸 수 있는 입법에 대한 고민.

난이도는 정말 쉬운데 내용들을 읽어보면 「형법총론」의 느낌이 난다. 확실히 이건 총론이다. 범죄의 세가지 요건(구성요소, 위법성, 책임)이나 영장 발부 주체와 요건, 형사법정의 구조, 공소시효, 양형 등 정말 기본적인 이야기를 너무나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이런 교수님을 진작 만났더라면 총론 점수 잘 받았다구요🥲)
조근조근 옆에서 말하는 듯한 문장도 그렇지만 이해를 돕는 가장 큰 이유는 톡톡 튀는 비유에 있다. '소머리곰탕으로 소머리를 재구성하기', '피자를 굽는 일과 피자 레시피를 만드는 일' 등 귀엽고 가벼운 비유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확실히 이해를 돕는다.

물론 이해한다 해서 전부 공감이 되고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판사의 양형이 약해지는 이유를 판사였던 저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해보려 쓴 부분이 있었다. 판사의 중간자적 입장이 원인이거나 일반인들은 최악의 순간만을 보지만 판사는 장기간 접하면서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보게 된다, 재판 중 감정적 요인이 작동한다던가 선례에 묶이는 경우가 있다 등의 이유가 있었다.
혹시 '웰컴투비디오' 사건을 기억하는가. 범죄에 관심이 없더라도 모를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그 범죄의 중함은 말할 것도 없고, 처벌의 한없는 가벼움과 미국에서 손정우의 범죄인 인도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분노가 들끓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저자 역시 알쓸범잡 때 이에 대해 판사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말했다가 방송을 다시 보고 후회한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판사의 양형이 약해지는 이유가 대개 감정적인 이유라면... 진짜 AI로 대체되어도 할 말 없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어떤 말을 해도 그 형량에 대해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며 (불가능할 것) 저자 역시 형량이 적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그렇다 해도 확실히 법 종사자가 이렇게 솔직히 의견을 이야기하는 게 신선하고, 나와 일치하는 부분도 있어서 속이 시원했다.


「알쓸범잡」으로 일반인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은 경험이 있기에 판사와 심의관을 넘어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해왔을 고민들에 대한 현재의 답이 솔직하게 담긴 책이자, 범죄로 보는 사회의 내면 그리고 시민의 입장에서도 같이 고민이 필요함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는 책이었다.
「알쓸범잡」 팬이었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뒤에 장항준 감독의 추천사가 있는데 "이렇게 말 잘하는 줄 알았으면, 방송 때 더 시킬걸" 이라고 쓰셨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양형이 피해자의 입장과 괴리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피해자가 법정에 등장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형사재판에서는 피해자를 피해자의 자격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피고인이 자백하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서도 보통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나올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판사로서는 피해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피해자의 양형에 대한 입장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형량을 정하게 됩니다. (p.116)

■저는 지금이라도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법에 엄연히 사형제도가 있고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하는 데도 행정부가 이를 집행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정의에 반하고, 유족에게 근거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며, 사형에 찬성하는 국민 다수의 뜻에 반하고, 법과 재판의 권위를 전체적으로 손상시키며, 흉악범죄를 억제할 수 있는 중요한 효과를 놓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형 여부는 우리나라의 주권 사항이므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거나 눈치를 볼 일도 아닙니다. (p.16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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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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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침략은 거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군사화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경제활동의 주체로서의 “국가”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앞으로 아마도 약 5~10년 동안 미 · 중 · 러 · 인도 등 여러 열강 사이에서는 전쟁과 갈등, 대립을 통한 “서열 정리”, 그리고 종속 지대(자원 지대 등)의 재분할 등이 대단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p.12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서방 국가들의 압박 속에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전쟁은 미국이 내세우던 질서가 얼마나 허무한지, 말 뿐인 세계화가 어떻게 박살나는지 그 민낯을 샅샅히 들춰냈다. 한 마음일 줄 알았으나 러시아를 지원하는 국가도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궁금했다. 나름 혁명의 국가인 러시아(구소련)인들이 왜 푸틴의 독재에 아무 저항 못하는지, 심지어 그 높은 지지율은 어디서 나오는지. 러시아가 뭐가 아쉬워서 세계를 상대로 먼저 전쟁이란 칼을 빼들었는지.


얼마나 내가 러시아를 몰랐는지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넓은 땅의 존재감과 세계사의 흐름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역량을 너무 부풀려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경제적 규모가 큰 줄 알았고, 여전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인줄 알았다. 그렇기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그저 푸틴의 제국주의적 야욕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내내 러시아의 경제적 규모와 그 산업 구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번듯한 IT 기업 하나 없고 수출 경쟁력도 떨어지는 '후진적 열강'. 그 상황 속에서 아직도 그들에게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는 것 역시 눈에 띄었다. 복잡한 정세와 러시아 국내 상황 속에서 꽤나 많은 계산 속에 이루어진 전쟁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설명은 설명일 뿐,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긍정이나 수용이 아님)

 

■ 1950년대 이후에는 국가에 어느 정도의 ‘여력’이 생겨 소련의 인민들은 비록 다당제 선거에서 원하는 정당의 후보를 찍을 권리는 없어도 아파트를 무료로 배정받는 것은 물론이고 별장을 지을 땅과 텃밭까지 무료로 제공받을 권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정치적 권리의 결핍이 사회적 권리의 풍요로 “보상”되는 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언의 “사회적 계약”에는 물론 대중들의 탈정치화 등과 같은 많은 문제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등지에서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지속되는 현상은 그와 같은 “보상”의 매력을 증명해줍니다. (p.62)

 

익숙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새롭게 알게 된 세계 정세라 끝까지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특히 3, 4부는 한국 이야기도 나오니 더더욱. 러시아의 전쟁과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기후 · 젠더 문제 등 전체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세계, 미국도 사실상 보호주의로 정책을 돌려 탈세계화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현재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한국인으로서 알기 힘든 이야기와 언론에서 절대 알려주지 않는 정보들을 가득 담고 있다. (ex. 푸틴과 박정희의 차이(p.204, 푸틴에게는 '김대중'이 없다), 파편화되는 세계,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시작됐다(p.283))


■ 이처럼 각국의 대외적인 다변화, 관계의 다면화, 다각의 실리 추구가 대세인 요즘의 세계에서, 윤석열 정부의 미국에 대한 "충성 어린" 태도는 장기적으로 커다란 비극의 서곡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p.286)


귀화한 구 소련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러시아와 세계 정세는 이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될 것이고, 제3자에 가까운 위치에서 한국의 상황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한창 올림픽하는데 속보로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을 했다고 뜬게. 진짜 당시에는 푸틴 머리에 소주 꽂은 줄 알았음. NO WAR 이라는 반전 메시지를 들었던 우크라이나 선수가 결국 총을 들고 참전했다는 것도 너무 슬펐고...


++ 책 내에 ''나 "" 같은 따옴표 사용이 너무 잦다. 강조하고 싶은 단어나 특이한 단어에 표시해둔 것 같았는데, 너무 잦으니까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졌음.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로만 가득한 참고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정작 무엇이 중요한 단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는 이야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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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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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판사와 그가 한 판결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아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당사자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를 신뢰할 때 비로소 판사와 판결에 정당성이 생기고, 그에 힘이 실린다. 따라서 AI 판사를 도입할지 말지를 결정짓는 것은 ‘AI 기술의 발전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판단을 신뢰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람 판사인가, 아니면 AI 판사인가. (p. 11)



판사는 멀고 판결문은 어렵다.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도 많고 일반적으로 접하는 문장도 아닐 뿐더러, 좋은 글로 보이지도 않는다. 수동 표현과 어법에 맞지 않는 애매한 문장들이 가득한 글을 읽다보면 이게 국문이 맞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뜬다. 이를 통해 접하는 판사의 이미지도 좋을리가 없었다. 물론 좋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가끔 나오는 친근한 판사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기사를 통해 납득할 수 없는 판결과 같이 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었다. 재판은 법조인이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적용받는건 일반인인데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도 될까.



■나는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오히려 거꾸로 새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법이 곧 판사의 말이다.” 판사는 사건에 적용될 법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 법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풀어 설명하는 것을 그 역할로 할 뿐이다. 판사가 하는 일은 ‘법’에 근거하며, 따라서 ‘법’을 벗어날 수 없다. (p.20)



10년간 판사로 재직해온 저자는 얼음정수기 사건, 땅콩 회항, 구미 아이 바꿔치기, 모다모다 샴푸 등 유명한 판례를 들어 이 문장들의 속을 들춰준다. 아직 현직에 있다보니 비판적인 분석보다는 자연스레 판사의 입장에서 그 나름의 고민과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이런 시각은 처음 접해보는 거라 신선하고 즐거웠다. 물론 사건을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한데도 사건을 길게 이야기함으로서 사견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주의해 당사자나 재판부 한 쪽의 편을 들어 다른 입장을 상처주지 않게끔 조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책은 미완의 책이다. 고민들은 현재도 새로이 쌓여가고 있으며 어떤 질문들에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이다. 그 고민만큼 더 바른 판결이 나오고 그것이 좋은 사회적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사려 깊은 글 속에 담긴 재판부의 속살들은 멀리에 있던 판사와 법을 개인의 곁으로 가까이 끌어들인다. 기사로 접한 판결들과 나의 시각차는 절대 좁힐 수 없어 보였지만, 기사로 나오지 않은 더욱 많은 판결에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p.199)'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 너무 좋았던 '황금들녘 판결'. 생전 처음보는 스타일의 판결문인데, 사건과 함께 읽으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판결문도 공문서라 품위를 지켜야 한다지만, 서정적이라 하여 품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비문으로 가득한 판결문보다는 이게 마음에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판결문이 때로는 무엇보다 사건 당사자를 납득시킬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p.199)



 

*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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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열두 세계 포션 6
이산화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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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어떠한 보상보다도 책임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더욱 원한다고 꾸준히 말해온 사람들에게, 그토록 원하던 대답을 들려주길 바랐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지구의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과받아 마땅했으므로.

p.89,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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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화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에서는 한국이기에 가능한 설정의 시작과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고, 『SF 보다 vol.2 벽』에 수록된 「깡총」에서는 거대한 세계관의 구축 없이 현실의 속성 단 하나 만을 살짝 비틀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함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이번 초단편집 역시 좋았다. 언뜻 현실과는 접점이 멀어 보이는 SF면서 내가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들보다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었다. 단편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치사회적 뉴스들이 있었다. (자세히 이야기하기엔 작가님이 ‘열세 번째’에서 내내 걱정하고 있는 압수수색을 당할까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솔직히 이게 초단편인 이유가 납득이 됨. 만약 얘기가 더 길어지면 진짜로 작가님 블랙리스트 오르는거 아니냐며…😢)

소설을 읽다 등골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귀신이 나오는 것도,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펼쳐놓는 것도 아니라 읽다 보니 현실이 선명하게 보이는 때 일 것이다. 희망도 공감도 현실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현실 감각 없이 외치는 공감과 치유란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시작점에 위치한다.


해당 소설들은 12와 연관이 된 주제들로 집필이 되었다. 읽으면서는 이게 어떤 12일까 했는데, 해설을 보니 황도 12궁, 올림푸스의 12주신, 십이지와 쿼티 키보드 12개의 기능키 등의 속성이 들어있었다. (사실 「새로고침」 외에는 눈치 못 챘었음.) 초단편임에도 오랜 기간 특정 주제를 가지고 짜여진 소설들이라 내용에서 주는 재미 외에도 구성에서 오는 치밀한 매력이 짙은 책이라 다방면으로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줄 것이다.



+ 아니, 「열세 번째」 이야기를 한 김에. 나는 당연히 평범한 작가의 말인줄 알고 읽었는데 구조 무슨일…? 꿈에서 깬 줄 알았는데 여전히 돌아가는 인셉션의 팽이.


++「새로고침」, 「지구돋이」,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에」가 너무 좋아서 필사하면서 읽었는데, 특히 「지구돋이」는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여 오싹한 분위기를 내는 게 좋았다.누가 읽든 상상하는 바는 전부 달랐겠지.




■“우리가 먼저 묻고 싶은데요. 눈앞에서 친구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면, 비서관님께서도 일단 구해내려고 뭐든 하실 거잖아요? 그러면서 왜 곳곳에서 다른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먼저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26 「그땐 평화가 행성들을 인도하고」


■과학기술은 때로 우리를 좌절시키고, 신은 절대 우리의 편이 아니며,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터전을 치명적인 살충제와 온실가스와 핵무기 따위로 망쳐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p.77 「지구돋이」



* 넘나리2기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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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의 감각 - 의식의 본질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 Philos 시리즈 26
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박제윤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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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에 눈코입만 그려도 정을 주는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안 팔리는 빵 봉투에 우는 이모티콘을 그리니 사람들이 많이 사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은 타인에게 쉽게 공감한다. 특히 인간과 포유류에게. 아이의 울음에 같이 안쓰러워하고 학대받는 동물을 보면 같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럼 물고기처럼 비명을 지를 수 없는 생물들은 어떨까. 저자가 의식을 연구하는 이유 중엔 이런 생물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고자 하는 것도 있다. 그들 역시 고통스러운 자극에 반응한다면, 의식이 있다면 사람들이 끔찍하고 무분별하게 포획하고 살상할 수 없을테니까.


그럼 이 의식이란 무엇일까. 신경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저자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 의식은 경험이다. (p.23)

경험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의식하는지 부터 풀어 나간다.


저자는 가추추론 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주장을 풀어나가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력한 가설을 추론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달을 볼 때 달토끼, 광원 등 달의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일부만 보이더라도 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혹은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추론하는데 이런 것이 가추추론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들이 추론의 한 방법이었다니.


가장 관심이 갔던 파트는 동물 의식 관련 부분이었는데, 달라이 라마와 저자의 입장 차가 인상적이다. 불교에서 생명은 체온과 지각력, 즉 감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므로 모든 생물이 고통받을 수 있어 소중하다고 여기는 반면 저자는 일부 동물만이 지각력과 의식적 경험이라는 재능을 공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릿속에 문어 선생님만이 꽉 찬다. 문어 선생님 진짜 의식 있는거냐고 없는 거냐고 짤짤 흔들고 싶다. 아니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낙지인가도 있지 않은가...우리 문어...있다구...나랑 감정을 교류하는게 맞다구... 저자는 무척추동물인 문어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인 것 같지만. (「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역시 같은 입장)


그렇다면 약간 비틀어보자. 생명이 아니라면 의식이 있을까. 컴퓨터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는 의식이 있어 인간처럼 느낄 수 있을까. 저자와 의견이 비슷하여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과 같이 느낄수 있을까. 지능과 경험이 같은 개념이 아닐진대, 지능이 높다 하여 다 생명일 수는 없는 일이다. 


10번째 주제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환자들이 말하는 마음이 거의 항상 좌측 대뇌피질 반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재밌고, '외계인 손 증후군'이 떠오르는 '좌측 마음이 원하는 것과, 우측 마음에 의해 통제되는 신체의 왼쪽이 원하는 것, 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214)도 재밌는데, 뇌를 만일 다른 뇌들과 연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의 뇌를 연결하여 단일 의식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군집이 되는 미래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진짜 디스토피아..


물리법칙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셋, 넷, 또는 수백 개 뇌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뇌가 완전체로 합쳐지면서, 각자의 고유한 능력, 지능, 기억, 그리고 기술 등이 점점 더 커지는 초월적 마음에 추가될 것이다. 

나는 더 큰 완전체를 위해 개성을 포기하는, 초월적 마음을 추구하는 사이비 종교와 그 종교 운동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한다. (p.218)

  

  

솔직히 말하자. 중간부터 어렵다. 명쾌하게 '의식은 경험이다'라고 하고 쉬운 초반을 지나 통합정보이론(IIT) 파트에 이르면, 저자가 갑자기 신나게 개념 설명도 없이 이론의 장점부터 언급한다. 결국 IIT는 구글의 도움을 받아 읽어 나갔다. 이게 왜 기초이론이고 왜 탁월하고 심오한지 초장에 이 책 하나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옥장판 갖고 와가지구 이게 어떤 도구인지 설명은 안해주고 냅다 '아~~~이게 참 좋은데~ 아유, 이게 좋은디~'하는 느낌. 신난 교수님을 멍하니 쳐다보는 학부생의 느낌을 오랜만에 받았다.

최근에 읽었던 '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이 초반부 개념만 잡고 넘어가면 꽤나 난이도가 쉬웠던 것과 비교가 되었다. 


+ 아르테 공식 인스타 계정에 편집자 J 님께서 필로스 시리즈 중 '의식'을 주제로 한 4권의 도서를 간단하게 정리해주신 피드가 있는데 천재같음... 언젠가 북토크(를 가장한 강의) 해주세요...


++ 열심히 노션으로 정리해가며 읽었다. 그냥 읽으면 머릿속에 1초도 남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서술 방식이 도움이 꽤 되었는데, 주제 들어갈 때마다 첫 문단에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줘서 그 주제에 포인트를 맞춰 읽으면 그나마 길을 잡아 더듬어 나아갈 수 있었다.



* 해당 글은 출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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