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리 따는 사람들 ㅣ 서사원 영미 소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평점 :

루시가 행방불명 되던 날, 흑파리들은 유난히 배가 고파 보였다. (첫 문장)
한 원주민 가족이 있다. 캐나다에 살던 그들은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주로 국경을 넘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네 살배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부모님과 4명의 남매들은 루시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또 다른 가족이 있다. 미국 메인주에서 외동딸 노마와 함께 사는 부유한 부부. 노마는 계속 이상함을 느낀다. 부모님은 백인인데 자신의 피부는 거뭇하고, 밤마다 꾸는 꿈에서 들리는 '루시' 라는 이름. 하지만 모든 어른들이 한마음으로 노마의 위화감을 부정한다.
두께를 보고 3일 정도로 나눠서 읽으려 했는데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게 책을 펴자마자 첫 챕터에서 애기가 없어졌어, 근데 다음 챕터에 그 애기가 나와, 백인 부부가 걔를 유괴한 거 같음. 스릴러나 추리소설이 아니라서 초장부터 내막이 나온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표지와 제목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라 안타깝고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루시는 언제 돌아오나.
우리가 주로 생필품을 구하러 가는 상점에서 만나는 백인들은 원주민 피는 어쩐지 신맛이 나서 흑파리들이 물지 않는다고, 그래서 블루베리 따는 일에 적격이라고 했다. (p.19)
이야기를 보다 보면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백인은 원주민의 정체성을 지우려 하고, 쉽게 착취하고, 아이마저 빼앗아간다. 갈 곳 잃은 분노와 가족의 상실로 인한 절망 속에서도 원주민들은 잊지 않으려 한다. 엄마가 루시의 작은 신발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던 것처럼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외력으로 기억이 잊혔어도 영혼이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다. 맞물리지 않는 퍼즐조각이 된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삶에 힌트를 숨겨 길을 만들어낸다.
그에 비해 원주민 가족의 삶을 파괴한 백인의 말로는 망각으로 끝난다. 피해자들은 기억하고 살아가는데 가해한 측은 망각하며 죽어가는 대비가 서사 후반부터 극에 달한다.
"아니야. 백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에게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했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하지만 이젠 알았으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느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개자식들이 승리하게 둘 순 없어. 빼앗긴 걸 되찾아야 해. 우리 모두 그래야 해. 그리고 그건 '피테웨이'(pitewey, 미크마크 원주민들의 언어) 가 '차'를 의미한다는 걸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p.393)
조와 노마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분노에 사로잡힌 조의 이야기보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노마의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애초에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나 자기 연민에 빠진 조가 이해되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이런 탕아마저 용서하고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만 '너무 미안해서 그랬다'로는 납득되지 않는 행동들이 있어서, 오히려 노마의 이야기를 더 길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처음에는 조의 시점으로만 서술되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노마가 집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이야기나 엄마의 과잉보호를 읽고 있으면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 같기도 하다구... 이 쪽이 훨씬 재밌다구...
기구하다면 기구한 원주민 가족들의 삶을 보면서 슬픔을 기억한다는 것,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평안함을 찾을 수 있으리란 작은 위로가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모든 일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슬픔은 때로 너무 커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차차 나아져서 유용한 것으로 성장한다. (p.243)
+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무슨 '어제 마트에서 생선을 세일하더라' 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그날 00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갑자기 징조 없이 죽음이 나와버림. 심지어 장면도 안 보여준다. 원주민의 삶과 죽음이란 너무나 가까워서 그다지 유별난 게 아닌 것 같기도 해 약간 슬펐음.
++ 인생 모른다고 생각한 부분이 어머니가 신을 저주했던 날의 사건으로 인해 간절히 기도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준다는 말도 생각나기도 하고.
"조, 어떤 사람들한테는 세상의 관대함이 필요하단다." (p.1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