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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 인류 - 기적과 죽음의 연대기
백승만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5년 3월
평점 :

하지만 스테로이드라는 기적의 물질은 지금 버젓이 약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연구자들도 껄끄러워하는 물질이 어떻게 약이 될 수 있었을까? 뭔가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 p.14
스테로이드는 일반인에게도 그다지 낯선 용어가 아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시즌 한정 애국자, 시한부 스포츠덕이 되는 나도 그때쯤 되면 누가 약을 먹었나, 상대방 잘하는 거 보니까 약을 먹었네, 사람 몸이 왜 저래 진짜 스테로이드 먹었나 하면서 촉각을 세운다. 정확한 개념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저거를 먹으면 근육이 펌핑되고 스포츠 경기에 도움이 되는 도핑약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마침 너무 재밌게 읽었던 『대마약시대』의 저자가 스테로이드에 대해 쓴 신간이 나왔기에 읽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마약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음)
『스테로이드 인류』는 그 스테로이드의 역사와 함께 약물을 다방면으로 뜯어보는 책이다.
스테로이드에 대한 관심은 회춘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회춘은 수은을 먹은 진시황 때부터 '핫한 이슈'였다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듯,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여기 1800년대 후반에 개의 고환을 이용해 '젊음의 비약'을 만들고자 한 과학자가 있었다. 제조법은 그야말로 사이비 주술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이다. (1) 개의 고환에서 피를 뽑는다. (2) 개의 정액을 채취한 뒤 앞서 채취한 피와 섞는다. (3) 개의 고환을 잘라 으깬 후 아까 만든 혼합액과 섞는다. 그럼 젊음의 포션 완성! 진짜 미쳤다. 어디서 계시를 받아왔나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조합법인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약을 스스로에게 투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회춘했다고 주장하는데 근거는 기분이다. 이전에 비해 팔팔해진 느낌이 들었다는 것. 솔직히 저 조제약을 투여받은 입장에서는 반드시 회춘해야 한다.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 덕에 개들의 고환이 남아나질 않았다. 개들이 다리 사이에 젊어지는 열쇠를 달고 다닌다는데 어떤 사람이 눈이 돌지 않았을까. 고환을 과학자들이 지지고 볶는 과정에서 테스토스테론을 발견하고, 약물로서의 기능들을 찾아낸다. 진짜 '이렇게까지 한다고'의 연구들 뿐이라 생전 처음 보는 의학 용어가 나와도 읽는 내 속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피임 이야기조차 못하게 한 '콤스톡법'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여자가 낳는데 왜 여자에게 선택권은 물론이요, 발언권조차 안 주는 거지. 이 악법 아래에서 산아제한 운동의 지도자인 마거릿 생어와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한 캐서린 매코믹, 그리고 최초로 체외 수정을 성공한 과학자 핑커스가 뭉쳐 피임이라는 영역에 도전한 이야기가 마치 드라마 같았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합한 인재들이 퍼즐처럼 짜 맞춰져 이루어낸 업적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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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에 대한 이야기, 심지어 그 연대기를 따라가는 일은 비전공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저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그 길을 어렵지 않게 이끈다. 이 책을 통해 스테로이드라는 약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그럼에도 과학자들은 어째서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지속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열정이 인상 깊게 남는다. 소위 '미친 짓'이든 고귀한 의도가 있는 행동이든 그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기에 후대에 그 발자국을 따라 현대의 과학이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테로이드'라는 주제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매력이 있지만 무엇보다 글이 재치있다.
제대로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약이지만, 방심하는 순간 건강을 갉아먹는 독으로 돌변하는 위험한 물질이니 전문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사용하길 바란다. 그게 어렵다면 스테로이드 의약품이 위험한 약이라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기억했으면 싶다. 그것이 한때나마 신의 물질이었던, 속절없이 타락했다가 보란 듯이 부활한 이 경이로운 약을 길들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p.300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