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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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번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여성들은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K양을 사랑하는 T군이 있다. K양을 너무 좋아하는데 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들어온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하고 싶긴 한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T군은 일단 K양을 자신의 하숙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면도칼을 꺼낸다. 자신의 왼손바닥을 긋는다. 피를 뚝뚝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K양이 뜨거운 키스를 해주리라 믿는다(어째서?). 그러나 K양은 울면서 돌아가버리고 T군은 파출소로 호출된다.


 


잡지 <신여성>에 소개된 일화이다. 묵묵히 부모가 정해준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게 아니라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들어오고 서구의 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그 시절. 틀어올린 머리 혹은 단발에 짧은 치마, 구두와 목이 긴 양말, 학교에 다니고 유행의 변화에 민감했던 신여성. 권투에 열광하고 거침없이 담배를 피우며 이 잡지를 읽던 그 신여성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해당 책은 잡지 <신여성>을 통해 보이던 시대상과 여성들의 변화, 이 변화를 바라보고 바른 방향으로 '계몽'하려는 남성들의 시각과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여성'들에게 씌워지는 각종 프레임들을 선명히 보여준다.  


잡지는 소비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상업지로의 성격을 강화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신여성/모던걸을 낭비적 소비의 주체로 인식하고 비난했다. 화장품과 화장법에 관한 시시콜콜한 기사를 내보내고 세련된 맵시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여성이 옷차림, 머리 단장, 얼굴 치장 같은 물질적 향락과 사치에만 열을 올리는 '못된 걸' 이 되어간다고 비난했다. 거기에, 먹여주고 입혀주기를 바라는 의타적 심성이나 세속의 헛된 명예를 얻고 싶어 하는 천박한 허영심이 신여성의 소비를 조장하고 정신을 타락시키는 원인이라는 심층적 분석까지 내걸었다.

김기전은 조선의 학교와 사회가 교육받은 여자로 하여금 사회에서 나름의 새로운 직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능력과 시야를 함께 함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직분을 좀 더 맵시 있고 슬기롭게 수행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들의 소비는 허영이 되고, 사회에 진출해보려는 첫 걸음은 헛된 명예를 얻고 싶어하는 천박함이라고 치부된다. 여성들을 위한 잡지이자 소비를 부추기는 매체인 <신여성>에서조차 이러는데, 다른 사회적 시선이라고 고왔을까. (솔직히 말하면 한문장 한문장 떼어다가 글 쓴 사람을 요목조목 쥐어다 패고 싶음) 


이중성과 여기에 쏟아지는 각종 맨스플레인들.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정숙할 것과 엄마가 될 준비를 강요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엄마가 된 사람들에게는 또한 가정에 충실하고 슬기롭고 현명한 엄마가 될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지금이라고...뭐가 다르지...? 현재도 여성이 향유하는 문화들은 쉽게 후려쳐지며 그 문화를 제공하는 자들도 여성을 쉽게 무시한다. 핑크텍스는 너무나 만연하고 여성이 좋아하는 SNS 유행 카페는 허세의 상징처럼 비춰진다.



일반 여성의 향학열이 높아져 '학교'가 대세가 되었고 1926년 정도에 이르면 "늙어가는 몸으로 인력거를 끌어서 딸의 학비를 대어주는" 부모가 등장하고, (···)


그런데 이번에는 송계월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고, 아이의 아버지가 여럿이라는 소문이 났다. 문제는 그것이 "한낱 서울 거리의 불량 청년들 사이에서" 나도는 뜬소문이 아니라 무려 카프KAPF의 문인이었던 이갑기가 <여인>이라는 잡지를 통해 말했다는 데 있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아들은 온 집안이 노력해서, 부모가 밤낮으로 일하고 딸이 공장에서 노동력을 갈려서 학교에 보내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다가, 딸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니 부모의 늙어가는 몸을 강조한다. 늙은 부모가 저렇게까지 노력해서 보내야 하는가, 단지 '대세'를 따르기 위해 가족이 희생하는게 맞느냐고 묻기 시작한다. (솔직히 너무 열받음. 하고 싶은 말만 한 솥이 나와서 다 못씀)



심지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신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는 여성, 사회 구조를 저격하는 여성에게 문란하다는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것도 얼마나 저열한가. 그리고 이 사회는 저 때와 얼마나 다른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의 외모와 성적으로 공격하는건 지금도 너무 흔해서 예시를 들기도 입 아픈데 아주 유구한 역사였구나^^



서양식 담배 역시 새로운 기호품이었고, 아직 그 기호품 애용에 남녀 구별이 정착하기 이전이라 여성의 흡연에 대한 비난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사실 무거운 이야기가 많은 것 같지만 그 시대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사회 설명이 재미있다. 호떡을 먹는 남학생들, 옹기종기 모여 같은 하숙집에 사는 친구들끼리 군고구마를 까먹는 여학생들의 모습도 절로 그려진다. 맥주도 그 시절에는 음료로 여겨져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삐루 5잔'(!!!)을 권고했던 시대라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담배가 막 들어왔을 그 시절에 오히려 담배를 피우는 여성에 대한 비난 어린 시선이 적었다는 것이었다. 사적으로야 담배를 피우는 것이 흠이 아니라지만 미디어에서 공연히 금연을 다짐하고 흡연을 당당히 밝히는 남성 연예인들과 달리 여성들이 그랬다가는 당장에 '흡연 논란'이라는 헤드라인이 달린다. 예능에서는 여전히 "너 담배 피워?"가 개그라는 껍질을 쓴 비난으로 사용된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인지 퇴보한건지 물어봐야만 아는 문제는 아닌거 같다.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짧으면 짧다지만 길면 긴 시간인데 계속 현 시대로 읽힌다. 주어는 여성이지만 남성과 사회 전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는 그 때에 비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온함'에 대해서 너그러워졌는가. 여성만의 역사가 아니기에 혼자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리를 맴돈다. 역사는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교차이기에 널리 읽히고 같이 답을 찾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 여성 교육이 시작되고 진행될 수록 여성들의 가정 복귀 비율이 줄어든다. 지금까지 가정에 묵묵히 힘을 다해왔던 여성들이 많았던 것은 그저 배움의 기회와 선택지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흔히들 '요즘 여자들은 옛날과 달라 이기적이야' 이러지만 예전에는 그럴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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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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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형식상으론 자원하여 간 것이었지만 실질은 강제 동원된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맞고 학대받았다. 잘 때리라고 맞았다. 그리고 포로들을 때리고 학대했다.

서문에서 저자는 말한다. '재미를 위해 썼다고'. 의도에 매우 충실하다. 역사에 고개를 들지 못할 기사가 쏟아지는 현재 읽어야 할 시대적 이유와 고민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일단 재밌다. 19세기 말~20세기 중반 식민제국주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데도. 거시적인 관점보다 한 인물의 드라마로 시대가 펼쳐진다. 무겁고 피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입체적인 사람의 이야기다. 심지어 그 재미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뼈 아프다.

얼마전에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창비, 2024) 을 읽고 나니 저 문장이 다르게 다가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게 죽는 것 보다 어려운 시대라도, 분명히 사람으로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고 구조와 시대에 무책임하게 손 놓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읽어내었다.  구조적 악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무결하지 않다. 모든 역사과 사건의 공범이며 방조범이다. 과거와 미래에 부끄러운 기사들이 쏟아지는 현 상황에서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 


역사에 질문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되는지 바로 옆나라 일본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아니 일본까지 넘어가야 하나, 역사가 후퇴하는 현 정권은 어떤지. 즐겁게 몰입해서 읽다가도 챕터 마지막의 질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참담하다. 


이렇게 일본에서 위안부의 ‘효능’을 체험한 미국이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 정부에 위안부 공급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미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성 착취 제도의 삼각 고리다. 

양공주는 팡팡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전시 위안부 제도의 유산으로 탄생했다. 미국, 일본, 한국의 수직적 삼각동맹을 뒷받침하는 허리 아래의 토대가 됐다. 그 덕에 주린 배 채우고 편히 잠들던 이들이 이들을 비곗덩어리 취급하며 가두고 내쫓았다. 일본의 위안부는 성노예 제도라고 비판하면서 제 나라의 양공주는 기억에서 지웠다.

소설 속 대학생은 약간의 선의와 죄책감을 겸비한 흔하디 흔한 지식인 남성 역을 맡았을 뿐이다. 자기의 상상 속에서 양공주를 역사의 ‘불가피한‘ 희생양이라고 멋대로 규정하고, 새 삶을 살라고 권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처투성이 그녀를 사랑할 자신도 의사도 없다. 무엇보다 책임에 대한 인식이 없다. 새 삶을 살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소설 속 남학생과 양공주의 관계를 넘어, 한국이 역사적 피해자인 여성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위안부는 일본이 끌고갔다. 양공주는 한국이 만들어내었다. 자신들이 내몰아 놓고, 멋대로 불쌍해 하고 감히 새 삶을 살라고 권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주홍글씨를 붙였다. 그리고 발을 뺐다. 기억에서 지웠다. 모든 일에 책임이 없다는 듯, '시절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지금 와서 따져 무엇하냐는 듯. 



한국은 '잊지 않겠다'고 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세월호 사건때도 그랬다. 온 사회가 애도했고 해당 사건은 선량한 국민들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었다. 너무 아파서 그랬을까. 정치권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건을 덮었고, 일반인들은 고통스러워서 그걸로 끝냈다.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p.44)'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서 첫 걸음이 시작되는거니까. 그러나 그 시간에서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 걸어나갔는가. 아직도 모든 게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게 아닐까.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p.302) 사람들. 이분법으로 나는 선, 너는 악. 나는 피해자, 너는 가해자 이렇게 나뉘지 않는 세계에서 서로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 단순 '알고 있음'은 '잊지 않는다'와 다르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있었을까. 필사적으로 가려왔던 달의 뒷면같은 이야기가 마음을 찔렀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잭 런던 짜증나. 집에 있는 『야성의 부름』 어떻게 읽으라고 이녀석아.

 ...아니 근데 한국인 죽이고 싶다 너무하지 않냐고 넌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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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풍경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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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종종 가장 생동적인 상상력이 생각해 내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울 수 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p.231, <적막한 집>)

에드거 앨런 포, 보들레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낭만주의 문학의 대가 호프만의 중단편집 『밤 풍경』.


유명한 <모래 사나이>가 그렇듯 읽어보면 에드거 앨런 포 보다는 조금 더 환상적이다. 포가 더 어두운 호러라면 호프만은 동화같은 환상성이 섞인 북유럽 괴담의 느낌. 악마, 마녀, 유령, 환영.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섞이고 기이한 현상과 논리적인 상황이 동전의 양면처럼 겹친다. 



화려한 거리에 덩그러니 있는 황폐한 집, 고령의 관리인과 개 한마리만 살고 있다는 집의 창문에서 희고 아름다운 여성의 손 하나를 본 후 속절없이 빠져드는데 어느 날 부터 거울에서 그 여자가 보인다는 이야기 (<적막한 집>)


변호사인 할아버지를 따라 로시텐 가문의 장자에게만 상속된다는 로시텐 성을 방문한 주인공. 그 곳에서의 첫날밤 그는 폐쇄되고 벽으로 막은 문 너머에서 손톱으로 긁는 소리를 듣는다. (<장자 상속>)


베일을 절대 벗지 않는 임신한 여자, 심지어 그 안에도 얼굴에 착 붙는 하얀 마스크까지 꽁꽁 둘러야했던 이야기 (<서원>)



호프만의 대표작이라 할 법한 <모래 사나이>와 <이그나츠 데너>는 사실 이미 읽은 적이 있어서 나는 국내 처음으로 전편이 소개되었다는 『밤 풍경』이 궁금했었다.



<모래 사나이>의 유모가 나타나엘에게 '모래 사나이' (아이들이 잠자러 가기 싫어하면 다가와 모래를 한 줌 눈에 뿌리지. 그러면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머리에서 튀어나온단다. (p.12)) 이야기를 해주거나, <적막한 집>에서 유모가 저녁에 거울을 보는걸 즐기는 어린 테오도어에게 '아이들이 밤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울에서 어떤 낯설고 역겨운 얼굴이 내다볼 거고 그러면 아이들의 눈이 경직되어 버린다(p.252)'라고 겁을 주듯 잔혹동화같은 면이 있다. (사실 안 자는 애들 재우려고 무서운 얘기 하는 건 어디든 똑같나보다)




그러나 공포감을 이끄는 요소가 그런 단편적인 것은 아니다. 공포는 인물의 내면에서 온다. 인물이 점점 미쳐가는게 보이는데 작품 내의 주변인과 작품 밖의 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상적임에서 기이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보이는 순간 작품은 광기로 가득한 길을 달린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인물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광기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냐에서 파멸의 기로가 나뉜다. 


호프만의 기이한 이야기들은 현실과 환상 그 사이를 풍자로 날카롭게 꿰뚫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인간 내면의 욕망과 광기를 풀어낸다. 직설적이고 일차원적으로 다가오는 기괴함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무지(無知)에서 오는 불안함이 가득한 단편들은 무더운 여름보다는 싸늘한 가을 밤이나 추운 겨울 밤에 어울린다.




+이런 게 절대악인가 생각이 드는 <이그나츠 데너>. 선과 악의 대립에서 결국 선이 이겼지만 그 타격으로 삶이 걸레짝이 되는데... 이거 그냥 영화 『곡성』이다. 이그나츠는 미끼를 던져부렸고? 안드레스는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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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전쟁 - 세계화, 제국주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향신료 탐욕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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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동양의 향신료를 원했고 이들의 욕망은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p.34)


학생 때 '실론티' 캔음료를 좋아했었다(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자판기의 실론티를 몽땅 털어간 건 나였을 것이다. 확실하고 일관된 취향에 친구들이 그냥 갖다주기도 하고 생일 선물로 실론티 다발, 미안할때도 실론티, 부탁할 때도 실론티. 심지어 모르는 애들도 실론티를 주곤 했었다. 내 사물함에는 온통 실론티로 가득했다.



이 실론ceylon은 현재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는 차茶로 유명한 나라인데, 무려 440여 년 동안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로 살아온 역사가 길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오로지 '향신료' 때문에. 향신료는 동양보다는 서양에 더 큰 영향을 미쳤고 향신료에 눈이 돌아버린 유럽 열강들은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오로지 향신료만을 바라보고 목숨을 던져 항해하고 전쟁을 했다. 수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말로만 전해지고 실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스파이스제도'를 찾는 과정 속에서 짓밟혀 나갔고,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가 등장했고 주식회사가 만들어졌다. '검은 보물'이라 불리는 후추 한 알 값이 진주 한 알 보다 값이 나갔었다니 탐욕이 세계사를 뒤흔들고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멜 표류기>로 익숙한 하멜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으며 향신료 도둑 이야기, 향신료의 확보를 목적으로 항해하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 이야기 등은 낯설지 않지만 향신료를 중점으로 파고들어본 적이 없기에 새로웠다.

심지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나오니 더더욱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실감이 되면서, 그럼에도 바다로 떠나는 사람들의 의지에 감탄하게 된다. 탐욕이니, 생계니 어쩌니 해도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서쪽 항로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마젤란 선단은 270명이 5척의 배를 타고 출발해 한 척의 배와 18명이 돌아왔다. (p.120)



사실 인간으로서의 용기고 뭐고 사실 동인도회사의 무자비함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무자비한 식민지 경영, 오로지 서양인의 탐욕을 위해 약탈당하고 학살 당했던 많은 식민지 국가들. 예를 들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얀 쿤은 군대를 몰고 가 런섬을 초토화 시켰다. 남자는 모조리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고 추방시켰으며 모든 육두구 나무는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 섬 뿐만이 아닌 반다 제도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솔직히 여기서 네덜란드가 '한국이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얀 쿤의 동상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물론 학살자, 살인자라는 네덜란드인들의 평가도 있음)고 하는데, 비교 자체가 진짜 이순신 장군한테 폐도 폐도 이런 폐가 아닐 수가 없다. (물론 저자가 비슷하다고 비교한거 아님)

이순신 장군은 쳐들어온 왜군을 쫓아낸 사람인데 얀 쿤은 그저 학살자에 섬 파괴자에 국제법 상 약속이고 뭐고 휴전 깃발을 꽂고 비무장으로 온 상대국가의 최고위 인사를 저격한 자 아닌가. 그저 향신료 독점 거래 하겠답시고 행한 학살 속에서 반다 제도 1만 5000명의 인구 중 1000여 명만 살아남았다는 걸 어떻게 애국자, 영웅으로 봐야하는지 모르겠다. 타국인의 눈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자국의 위인이라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제노사이드의 주범을 그렇게 기린다는 건 국가이미지에도 타격 아닌지...


쿤은 동인도제도, 즉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해의 반다제도에 살던 원주민을 말살한 제노사이드의 주범이다. 여태껏 세계사에 있었던 인종 말살 제노사이드는 정치적 이해관계, 또는 종교적 충돌 등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얀 쿤의 학살은 향신료인 육두구의 독점 거래 때문에 일어났다. (p.231)


해당 저서는 향신료를 중심으로 유럽사를 톺아볼 뿐이지만 그 '향신료 탐욕사'가 곧 세계사의 굵직한 흐름을 이끌어간다. 경제적 부를 보여줌과 동시에 권력을 상징하게 된 향신료. 인간의 탐욕으로 읽어 내리는 전쟁사가 퍽 매력있었다.


+ 토종이 아닌 청양고추 이야기는 아직도 너무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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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열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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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절망할 권리는 있지만, 인간 자체가 오염됐거나 타락했다고 선언할 권리는 없다. (p.135, <기억에 대해>)


좋은 뉴스를 듣기 힘든 요즘이다. 세상은 싫고, 정치사회면은 마음에 안 들고 '살다'라는 말보다는 '살아내다'라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리는 시기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고 무엇의 탓하기 쉬울 때 헤르만 헤세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 )'고 한다. 헤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보물같은 선집이겠지만, 잘 모르던 사람에게도 부드러운 흔적을 남겨줄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나)


지금껏 거의 다섯 세대 전부터 헤세를 읽는 독자층은 주로 14~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다. 아직 이상을 꿈꾸고 사회에서 되도록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p.12, <들어가는 글)


독자층만 보더라도 헤세의 글에서 무엇이 전달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을 아직 찾고자 하고 변화를 꾀하는 젊은 층과, 생업에서 은퇴한 노년층. 그러나 오히려 사회 기득권을 형성하는 연령대는 보이지 않는다. 헤세가 개인의 고유성과 양심에 대한 질문을 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개별성을 옥죄고 사회의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강제력에 저항한다. 그럼에도 모든 화살을 사회에 돌리고 밖을 공격하기 보다는 내면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알을 깨고 나오게끔 하면서 억지로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바꾸지 않고 나 자신으로서 자연스럽게 살아갈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사물을 향한 분노와 초조, 비난과 증오는 고스란히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 증오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불화와 추악함을 세상에 가져오는 사람도 나이기 때문이다. (p.305, <방랑>)


사실 주제만 떼놓고 보면 특별할 거 없는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내 주변 세상은 바뀌지 않고 타인은 내가 아니다.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나를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데 헤세는 이를 설득력 있게 말하면서 세상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그 스스로도 '미친 세상'이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와 사랑에 빠지는 법. 가끔은 우울함과 분노가 몸 속을 돌고, 나 자신이 싫어지더라도 그조차 나 스스로임을 인정하고 안정과 고요를 찾기를 바라는 헤세의 글을 보며 불교 관련 서적을 읽을 때와 비슷하게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세상을 사랑하는거 그거 어케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번 해보겠슴다


++ 워낙에 짧은 글들이라 자기 전에 머리맡에 두고 하나씩 읽기 좋았다. 꽤 괜찮았어서 다음 '열다' 시리즈의 주인공은 누가 될지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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