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풍경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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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종종 가장 생동적인 상상력이 생각해 내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울 수 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p.231, <적막한 집>)

에드거 앨런 포, 보들레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낭만주의 문학의 대가 호프만의 중단편집 『밤 풍경』.


유명한 <모래 사나이>가 그렇듯 읽어보면 에드거 앨런 포 보다는 조금 더 환상적이다. 포가 더 어두운 호러라면 호프만은 동화같은 환상성이 섞인 북유럽 괴담의 느낌. 악마, 마녀, 유령, 환영.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섞이고 기이한 현상과 논리적인 상황이 동전의 양면처럼 겹친다. 



화려한 거리에 덩그러니 있는 황폐한 집, 고령의 관리인과 개 한마리만 살고 있다는 집의 창문에서 희고 아름다운 여성의 손 하나를 본 후 속절없이 빠져드는데 어느 날 부터 거울에서 그 여자가 보인다는 이야기 (<적막한 집>)


변호사인 할아버지를 따라 로시텐 가문의 장자에게만 상속된다는 로시텐 성을 방문한 주인공. 그 곳에서의 첫날밤 그는 폐쇄되고 벽으로 막은 문 너머에서 손톱으로 긁는 소리를 듣는다. (<장자 상속>)


베일을 절대 벗지 않는 임신한 여자, 심지어 그 안에도 얼굴에 착 붙는 하얀 마스크까지 꽁꽁 둘러야했던 이야기 (<서원>)



호프만의 대표작이라 할 법한 <모래 사나이>와 <이그나츠 데너>는 사실 이미 읽은 적이 있어서 나는 국내 처음으로 전편이 소개되었다는 『밤 풍경』이 궁금했었다.



<모래 사나이>의 유모가 나타나엘에게 '모래 사나이' (아이들이 잠자러 가기 싫어하면 다가와 모래를 한 줌 눈에 뿌리지. 그러면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머리에서 튀어나온단다. (p.12)) 이야기를 해주거나, <적막한 집>에서 유모가 저녁에 거울을 보는걸 즐기는 어린 테오도어에게 '아이들이 밤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울에서 어떤 낯설고 역겨운 얼굴이 내다볼 거고 그러면 아이들의 눈이 경직되어 버린다(p.252)'라고 겁을 주듯 잔혹동화같은 면이 있다. (사실 안 자는 애들 재우려고 무서운 얘기 하는 건 어디든 똑같나보다)




그러나 공포감을 이끄는 요소가 그런 단편적인 것은 아니다. 공포는 인물의 내면에서 온다. 인물이 점점 미쳐가는게 보이는데 작품 내의 주변인과 작품 밖의 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상적임에서 기이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보이는 순간 작품은 광기로 가득한 길을 달린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인물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광기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냐에서 파멸의 기로가 나뉜다. 


호프만의 기이한 이야기들은 현실과 환상 그 사이를 풍자로 날카롭게 꿰뚫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인간 내면의 욕망과 광기를 풀어낸다. 직설적이고 일차원적으로 다가오는 기괴함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무지(無知)에서 오는 불안함이 가득한 단편들은 무더운 여름보다는 싸늘한 가을 밤이나 추운 겨울 밤에 어울린다.




+이런 게 절대악인가 생각이 드는 <이그나츠 데너>. 선과 악의 대립에서 결국 선이 이겼지만 그 타격으로 삶이 걸레짝이 되는데... 이거 그냥 영화 『곡성』이다. 이그나츠는 미끼를 던져부렸고? 안드레스는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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