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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형식상으론 자원하여 간 것이었지만 실질은 강제 동원된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맞고 학대받았다. 잘 때리라고 맞았다. 그리고 포로들을 때리고 학대했다.
서문에서 저자는 말한다. '재미를 위해 썼다고'. 의도에 매우 충실하다. 역사에 고개를 들지 못할 기사가 쏟아지는 현재 읽어야 할 시대적 이유와 고민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일단 재밌다. 19세기 말~20세기 중반 식민제국주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데도. 거시적인 관점보다 한 인물의 드라마로 시대가 펼쳐진다. 무겁고 피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입체적인 사람의 이야기다. 심지어 그 재미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뼈 아프다.

얼마전에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창비, 2024) 을 읽고 나니 저 문장이 다르게 다가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게 죽는 것 보다 어려운 시대라도, 분명히 사람으로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고 구조와 시대에 무책임하게 손 놓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읽어내었다. 구조적 악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무결하지 않다. 모든 역사과 사건의 공범이며 방조범이다. 과거와 미래에 부끄러운 기사들이 쏟아지는 현 상황에서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
역사에 질문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되는지 바로 옆나라 일본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아니 일본까지 넘어가야 하나, 역사가 후퇴하는 현 정권은 어떤지. 즐겁게 몰입해서 읽다가도 챕터 마지막의 질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참담하다.
이렇게 일본에서 위안부의 ‘효능’을 체험한 미국이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 정부에 위안부 공급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미국-한국으로 이어지는 성 착취 제도의 삼각 고리다.
양공주는 팡팡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전시 위안부 제도의 유산으로 탄생했다. 미국, 일본, 한국의 수직적 삼각동맹을 뒷받침하는 허리 아래의 토대가 됐다. 그 덕에 주린 배 채우고 편히 잠들던 이들이 이들을 비곗덩어리 취급하며 가두고 내쫓았다. 일본의 위안부는 성노예 제도라고 비판하면서 제 나라의 양공주는 기억에서 지웠다.
소설 속 대학생은 약간의 선의와 죄책감을 겸비한 흔하디 흔한 지식인 남성 역을 맡았을 뿐이다. 자기의 상상 속에서 양공주를 역사의 ‘불가피한‘ 희생양이라고 멋대로 규정하고, 새 삶을 살라고 권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처투성이 그녀를 사랑할 자신도 의사도 없다. 무엇보다 책임에 대한 인식이 없다. 새 삶을 살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소설 속 남학생과 양공주의 관계를 넘어, 한국이 역사적 피해자인 여성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위안부는 일본이 끌고갔다. 양공주는 한국이 만들어내었다. 자신들이 내몰아 놓고, 멋대로 불쌍해 하고 감히 새 삶을 살라고 권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주홍글씨를 붙였다. 그리고 발을 뺐다. 기억에서 지웠다. 모든 일에 책임이 없다는 듯, '시절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지금 와서 따져 무엇하냐는 듯.
한국은 '잊지 않겠다'고 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세월호 사건때도 그랬다. 온 사회가 애도했고 해당 사건은 선량한 국민들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었다. 너무 아파서 그랬을까. 정치권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건을 덮었고, 일반인들은 고통스러워서 그걸로 끝냈다.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p.44)'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서 첫 걸음이 시작되는거니까. 그러나 그 시간에서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 걸어나갔는가. 아직도 모든 게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게 아닐까.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p.302) 사람들. 이분법으로 나는 선, 너는 악. 나는 피해자, 너는 가해자 이렇게 나뉘지 않는 세계에서 서로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 단순 '알고 있음'은 '잊지 않는다'와 다르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있었을까. 필사적으로 가려왔던 달의 뒷면같은 이야기가 마음을 찔렀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잭 런던 짜증나. 집에 있는 『야성의 부름』 어떻게 읽으라고 이녀석아.
...아니 근데 한국인 죽이고 싶다 너무하지 않냐고 넌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