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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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판사와 그가 한 판결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 아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당사자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를 신뢰할 때 비로소 판사와 판결에 정당성이 생기고, 그에 힘이 실린다. 따라서 AI 판사를 도입할지 말지를 결정짓는 것은 ‘AI 기술의 발전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판단을 신뢰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사람 판사인가, 아니면 AI 판사인가. (p. 11)



판사는 멀고 판결문은 어렵다.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도 많고 일반적으로 접하는 문장도 아닐 뿐더러, 좋은 글로 보이지도 않는다. 수동 표현과 어법에 맞지 않는 애매한 문장들이 가득한 글을 읽다보면 이게 국문이 맞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뜬다. 이를 통해 접하는 판사의 이미지도 좋을리가 없었다. 물론 좋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가끔 나오는 친근한 판사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기사를 통해 납득할 수 없는 판결과 같이 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었다. 재판은 법조인이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적용받는건 일반인인데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도 될까.



■나는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오히려 거꾸로 새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법이 곧 판사의 말이다.” 판사는 사건에 적용될 법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 법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풀어 설명하는 것을 그 역할로 할 뿐이다. 판사가 하는 일은 ‘법’에 근거하며, 따라서 ‘법’을 벗어날 수 없다. (p.20)



10년간 판사로 재직해온 저자는 얼음정수기 사건, 땅콩 회항, 구미 아이 바꿔치기, 모다모다 샴푸 등 유명한 판례를 들어 이 문장들의 속을 들춰준다. 아직 현직에 있다보니 비판적인 분석보다는 자연스레 판사의 입장에서 그 나름의 고민과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이런 시각은 처음 접해보는 거라 신선하고 즐거웠다. 물론 사건을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한데도 사건을 길게 이야기함으로서 사견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주의해 당사자나 재판부 한 쪽의 편을 들어 다른 입장을 상처주지 않게끔 조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책은 미완의 책이다. 고민들은 현재도 새로이 쌓여가고 있으며 어떤 질문들에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이다. 그 고민만큼 더 바른 판결이 나오고 그것이 좋은 사회적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사려 깊은 글 속에 담긴 재판부의 속살들은 멀리에 있던 판사와 법을 개인의 곁으로 가까이 끌어들인다. 기사로 접한 판결들과 나의 시각차는 절대 좁힐 수 없어 보였지만, 기사로 나오지 않은 더욱 많은 판결에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p.199)'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 너무 좋았던 '황금들녘 판결'. 생전 처음보는 스타일의 판결문인데, 사건과 함께 읽으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판결문도 공문서라 품위를 지켜야 한다지만, 서정적이라 하여 품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비문으로 가득한 판결문보다는 이게 마음에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판결문이 때로는 무엇보다 사건 당사자를 납득시킬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p.199)



 

*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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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열두 세계 포션 6
이산화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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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어떠한 보상보다도 책임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더욱 원한다고 꾸준히 말해온 사람들에게, 그토록 원하던 대답을 들려주길 바랐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지구의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과받아 마땅했으므로.

p.89,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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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화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에서는 한국이기에 가능한 설정의 시작과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고, 『SF 보다 vol.2 벽』에 수록된 「깡총」에서는 거대한 세계관의 구축 없이 현실의 속성 단 하나 만을 살짝 비틀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함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이번 초단편집 역시 좋았다. 언뜻 현실과는 접점이 멀어 보이는 SF면서 내가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들보다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었다. 단편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치사회적 뉴스들이 있었다. (자세히 이야기하기엔 작가님이 ‘열세 번째’에서 내내 걱정하고 있는 압수수색을 당할까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다. 솔직히 이게 초단편인 이유가 납득이 됨. 만약 얘기가 더 길어지면 진짜로 작가님 블랙리스트 오르는거 아니냐며…😢)

소설을 읽다 등골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귀신이 나오는 것도,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펼쳐놓는 것도 아니라 읽다 보니 현실이 선명하게 보이는 때 일 것이다. 희망도 공감도 현실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현실 감각 없이 외치는 공감과 치유란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시작점에 위치한다.


해당 소설들은 12와 연관이 된 주제들로 집필이 되었다. 읽으면서는 이게 어떤 12일까 했는데, 해설을 보니 황도 12궁, 올림푸스의 12주신, 십이지와 쿼티 키보드 12개의 기능키 등의 속성이 들어있었다. (사실 「새로고침」 외에는 눈치 못 챘었음.) 초단편임에도 오랜 기간 특정 주제를 가지고 짜여진 소설들이라 내용에서 주는 재미 외에도 구성에서 오는 치밀한 매력이 짙은 책이라 다방면으로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줄 것이다.



+ 아니, 「열세 번째」 이야기를 한 김에. 나는 당연히 평범한 작가의 말인줄 알고 읽었는데 구조 무슨일…? 꿈에서 깬 줄 알았는데 여전히 돌아가는 인셉션의 팽이.


++「새로고침」, 「지구돋이」,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에」가 너무 좋아서 필사하면서 읽었는데, 특히 「지구돋이」는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여 오싹한 분위기를 내는 게 좋았다.누가 읽든 상상하는 바는 전부 달랐겠지.




■“우리가 먼저 묻고 싶은데요. 눈앞에서 친구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면, 비서관님께서도 일단 구해내려고 뭐든 하실 거잖아요? 그러면서 왜 곳곳에서 다른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먼저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26 「그땐 평화가 행성들을 인도하고」


■과학기술은 때로 우리를 좌절시키고, 신은 절대 우리의 편이 아니며,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터전을 치명적인 살충제와 온실가스와 핵무기 따위로 망쳐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p.77 「지구돋이」



* 넘나리2기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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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의 감각 - 의식의 본질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 Philos 시리즈 26
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박제윤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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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에 눈코입만 그려도 정을 주는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안 팔리는 빵 봉투에 우는 이모티콘을 그리니 사람들이 많이 사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은 타인에게 쉽게 공감한다. 특히 인간과 포유류에게. 아이의 울음에 같이 안쓰러워하고 학대받는 동물을 보면 같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럼 물고기처럼 비명을 지를 수 없는 생물들은 어떨까. 저자가 의식을 연구하는 이유 중엔 이런 생물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고자 하는 것도 있다. 그들 역시 고통스러운 자극에 반응한다면, 의식이 있다면 사람들이 끔찍하고 무분별하게 포획하고 살상할 수 없을테니까.


그럼 이 의식이란 무엇일까. 신경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저자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 의식은 경험이다. (p.23)

경험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의식하는지 부터 풀어 나간다.


저자는 가추추론 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주장을 풀어나가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력한 가설을 추론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달을 볼 때 달토끼, 광원 등 달의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일부만 보이더라도 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혹은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가장 그럴싸한 이유를 추론하는데 이런 것이 가추추론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들이 추론의 한 방법이었다니.


가장 관심이 갔던 파트는 동물 의식 관련 부분이었는데, 달라이 라마와 저자의 입장 차가 인상적이다. 불교에서 생명은 체온과 지각력, 즉 감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므로 모든 생물이 고통받을 수 있어 소중하다고 여기는 반면 저자는 일부 동물만이 지각력과 의식적 경험이라는 재능을 공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릿속에 문어 선생님만이 꽉 찬다. 문어 선생님 진짜 의식 있는거냐고 없는 거냐고 짤짤 흔들고 싶다. 아니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낙지인가도 있지 않은가...우리 문어...있다구...나랑 감정을 교류하는게 맞다구... 저자는 무척추동물인 문어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인 것 같지만. (「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역시 같은 입장)


그렇다면 약간 비틀어보자. 생명이 아니라면 의식이 있을까. 컴퓨터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는 의식이 있어 인간처럼 느낄 수 있을까. 저자와 의견이 비슷하여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과 같이 느낄수 있을까. 지능과 경험이 같은 개념이 아닐진대, 지능이 높다 하여 다 생명일 수는 없는 일이다. 


10번째 주제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환자들이 말하는 마음이 거의 항상 좌측 대뇌피질 반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재밌고, '외계인 손 증후군'이 떠오르는 '좌측 마음이 원하는 것과, 우측 마음에 의해 통제되는 신체의 왼쪽이 원하는 것, 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214)도 재밌는데, 뇌를 만일 다른 뇌들과 연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의 뇌를 연결하여 단일 의식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군집이 되는 미래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진짜 디스토피아..


물리법칙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셋, 넷, 또는 수백 개 뇌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뇌가 완전체로 합쳐지면서, 각자의 고유한 능력, 지능, 기억, 그리고 기술 등이 점점 더 커지는 초월적 마음에 추가될 것이다. 

나는 더 큰 완전체를 위해 개성을 포기하는, 초월적 마음을 추구하는 사이비 종교와 그 종교 운동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한다. (p.218)

  

  

솔직히 말하자. 중간부터 어렵다. 명쾌하게 '의식은 경험이다'라고 하고 쉬운 초반을 지나 통합정보이론(IIT) 파트에 이르면, 저자가 갑자기 신나게 개념 설명도 없이 이론의 장점부터 언급한다. 결국 IIT는 구글의 도움을 받아 읽어 나갔다. 이게 왜 기초이론이고 왜 탁월하고 심오한지 초장에 이 책 하나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옥장판 갖고 와가지구 이게 어떤 도구인지 설명은 안해주고 냅다 '아~~~이게 참 좋은데~ 아유, 이게 좋은디~'하는 느낌. 신난 교수님을 멍하니 쳐다보는 학부생의 느낌을 오랜만에 받았다.

최근에 읽었던 '센티언스 : 의식의 발명'이 초반부 개념만 잡고 넘어가면 꽤나 난이도가 쉬웠던 것과 비교가 되었다. 


+ 아르테 공식 인스타 계정에 편집자 J 님께서 필로스 시리즈 중 '의식'을 주제로 한 4권의 도서를 간단하게 정리해주신 피드가 있는데 천재같음... 언젠가 북토크(를 가장한 강의) 해주세요...


++ 열심히 노션으로 정리해가며 읽었다. 그냥 읽으면 머릿속에 1초도 남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서술 방식이 도움이 꽤 되었는데, 주제 들어갈 때마다 첫 문단에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줘서 그 주제에 포인트를 맞춰 읽으면 그나마 길을 잡아 더듬어 나아갈 수 있었다.



* 해당 글은 출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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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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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꽃으로 오고 여름은 잎으로 온다. 그리고 가을은 열매로 오고 겨울은 나무껍질(수피)로 온다는 말이 있다. 매일 만나는 나무를 살피며 서로 함께 삶의 기쁨이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나무는 이미 반려목이고 친구 이상의 치유목이 된 것이다. (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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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당산나무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당시 방을 구할 때는 집 앞에 커다랗게 있는 나무가 그것임을 몰랐지만.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도중 기사님께서 "여기는 주소를 부르는 것보다 당산나무라고 하면 다들 안다"라고 알려주셔서 그제야 당산나무임을 알았었다. 이후 그 나무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집을 나설 때 슬쩍 인사해보기도 하고, 과제가 쌓인 날에는 교수님의 심금을 울릴 레포트를 쓸 수 있기를, 시험 당일에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기를 빌면서 지나다니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나무가 내게는 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라기만 하는 양아치같은 친구였지만.





30년 이상 사진 기자로 근무한 사진가 겸 산림 교육 전문가인 저자의 이 사진 에세이는 그런 기억을 불러온다. 누구든 기억에 남는 나무 한 그루 쯤은 있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항상 나무와 함께 자라왔으니 말이다.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저자는 특이할 것 하나 없는 나무 하나에 눈이 간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간다. 매번 해가 넘어가고 계절이 바뀔때마다 그렇게 십수년간 나에게만 특별해보이는 나무를 꾸준히 찾아간다. 사진을 봐도 저자가 찍는 나무는 군계일학처럼 나무들 사이에서 특히 아름다움을 뽐내는 독특한 나무가 아니라 흔히 볼 수 있고 너무 가냘퍼서 시선조차 가지 않는 나무들이 대부분이라 이런 걸 보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누군가의 마음을 두들겼던 찰나의 순간이 담긴 사진이란 어떤 수식어나 말이 없어도 읽는 사람을 고요한 풍경 속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는 그냥 지나쳤던 나무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지나갈 것 같고, 핸드폰 갤러리에는 나무 사진이 조금 더 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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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골무 조직에서 나오는 점액질로부터 단단한 바위를 가르는 힘이 시작되는 것, 미약한 힘이지만 끊임없이 바위를 적셔 무르게 만들고 결국은 부식되어 갈라지게 하는 것. 달걀로 바위를 치고 또 치다 보면 바위가 정말 깨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 39)


□사람이 곁에 둔 나무 중에 천수를 다하는 나무는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주변을 살펴보면 잘려 쓰러지는 나무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나무들이 죽어 간다. 나무도 죽지 않으려고 애를 썼겠지만 아마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기에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p. 198)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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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밀리미터의 싸움 - 세계적 신경외과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페터 바이코치 지음, 배진아 옮김, 정연구 감수 / 흐름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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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밀리미터. 인식하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 cm도 아니고 mm. 손가락을 작게 움직여봐도 그것보다는 더 움직일 것이다. 그 미세함이 생과 사의 경계를 가르는 수술실의 이야기.


신경외과 의사로서 겪어왔던 사례들과 고민들, 환자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적혀있다. 어찌나 생생했던지, 수술실의 팽팽한 긴장감이 종이 너머로 전달되면서 읽는 나도 손을 모으고 환자가 무사히 완치되어 웃으며 걸어나가기를 바라면서 읽었다. 특히 뒤에 나오는 어린이 환자는 더더욱. 

어디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출혈에 긴장하며 지혈을 반복하고 고작 몇 밀리미터씩 고도로 집중하며 나아가는 작업을 몇 시간동안 하는 일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정신력과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하는 일일까. (인식하지도 못할 작은 움직임 하나로 환자에게 치명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수술이라니 생각만 해도 벌써 손이 바들바들 떨림...)

그런 의학 드라마이자, 저자의 고민을 담은 일기는 전문성이 짙은 내용이 나와도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생명 연장과 환자의 삶의 질을 저울질할 수 밖에 없는 의사의 선택과 환자의 예후가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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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수술을 할 때 겪게 되는 영원한 딜레마가 있다. 암을 최대한 많이 제거하여 환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선사해 주고 싶은 마음, 심지어는 환자를 완치시키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중요한 기능들, 언어나 운동능력을 상실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당사자들은 그것을 더 큰 손실로 느끼지 않을까?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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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신경외과의 탈영웅화를 위해 썼다고 했지만, 신화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고 인간적으로는 여전히 정말 영웅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품은 작은 우주인 뇌.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마 인류의 역사 마지막까지 뇌를 완전 정복하기는 힘든 일일 것이다. 그 미지의 영역을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작은 신경 다발을 섬세하게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 신경을 연구하고 기술을 만들어내는 과학자부터 최전선에서 환자를 삶으로 끌어올리는 의사, 수술을 보조하시는 그 수많은 분들. 모두가 개척자로서의 영웅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해내며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료진의 노력과 그 힘든 수술을 견뎌내려는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차가운 무기질적 속성으로 가득한 수술실을 채우는 경이로운 장면을 엿볼 수 있는 경험은 이 책이 제공하는 가장 독특한 선물일 것이다.


(사실, 말은 길었지만 진짜로 의학 드라마를 책으로 보는 느낌이라 그냥 봐도 재밌다.) 

 

+심지어 그런 수술도 있음...뇌 수술을 하는데, 수술 부위가 언어 영역과 가까우면 환자를 깨워서 치료하는겨.. 그니까 환자는 눈을 뜨고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뒷통수에서는 의사가 두개골을 열어서 수술하는 건데 이거 나만 충격받은게 아닌듯... 사람들 리뷰보면 이 수술에 충격 받아가지구 이야기하는거 넘 웃기고 귀여웠다.

 

++ 표지 재질에 대해서도 말을 안할 수가 없는데, 재질이 신기하다. 책에서 자주 느껴보지 못한 질감이라 손 끝에 집중하게 만들어줌. 의사들이 손끝에 미세하게 집중하는 감각을 독특하게 체험시켜주는 느낌.



* 해당 글은 출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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