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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서점에 가면 그의 책들이 곳곳에서 그 대신에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도록.
나 여기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널 잊지 않고 있다고.

가능한 많은 책들이 많은 곳에서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글을 썼다.

그러나 지난 육 년간 그런 소임을 충실히 수행해온 그의 책들은,
그에게 자부심과 실낱같은 희망과 생명을 주던
그의 책들은
그 날 따라 이상하리만치
초라하고 쓸쓸하게만 보였다.


-


예나 지금이나 그가 믿는 사랑이란 오직 상대가 우러러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
사랑을 놓치고,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책을 팔아도,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외모, 성격, 말투, 목소리, 풍기는 분위기와 체취,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그만의 개성이나 매력같은
진짜 모습들은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질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공한 작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와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그의 달라진 신분을 모르는 어느 곳 , 마주치는 어떤 누구로부터도
여전히 평범한 사람 취급을 받는 그저 그런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한 권도 팔지 못하는 나 김용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인가? 누구에게도 친구로 여겨지거나 남자로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는 괴로웠으나 아무리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괴감이 더할수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더 많은 책을 파는 것밖엔 없었다.

-


정말 사랑했던 사람하고는 영원히 못 헤어져, 용우씨.

누굴 만나든 그저 무덤위에 또 무덤을 쌓는 것뿐이지

-



두시간 반만에 완독을 했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나 또한 용우만큼 용휘의 존재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고
나 또한 용휘와 똑 닮은 사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알았을 때엔 유머러스하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시니컬하지만

파고 들어갈수록 자기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 변덕스럽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적으로 매력이 없는 사람.

그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신을 평생 거짓으로 포장해온 사람.

하지만, 지인이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미워할 수도
한심해할 수도 없는사람.

왜냐하면

나 또한 용휘만큼 그 사랑에 대한 감정이 인생을 뒤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용휘는 성북동에 사는, 자신이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녀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녀로 인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만을 향해 달려온 용휘는
그러한 목표의 구심점이던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자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없어진다.

인생의 중심이 그녀였는데
그녀가 정작 그의 삶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결국 중력에 반하여 무너지게 된다.

지구가 없다면 달이 지금처럼 그 주변을 돌 수 없는 것처럼


.

그는 그의 삶의 중심을 다시 그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아니면 또 다시 그의 삶을 지탱해 줄 새로운 중심을 찾기 위해

삶의 목표라고는 그녀밖에 없었던 진짜 김용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기약없는 떠남을 하고 만다.

나 또한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에


제롬과 용휘의 연대감을 다 알 수는 없지만.


-

이 책을 읽고는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유가 뭘까.


이 책은 용휘의 억눌렸던 그리움과 슬픔이 마지막에 봇물 터지듯이 넘쳐흘러
오히려 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

나는 그가 성북동 밤의 불빛을 산에서 바라보는 행위가
개츠비가 이스트 에그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개츠비와
성북동의 그녀를 사랑하는 용휘가

그리고 데이지를 위하여 자신이 부자가 되는 개츠비
성북동의 그녀를 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용휘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다만 개츠비는 멜로에 더 치우치고
실내인간은 추리 비슷한 요소를 더하여
궁금함을 더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자신이 아닌 사랑에게 부여하는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기에
상당히 비참한 결말을 초래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잊지 못했지만

그러한 자신을 받아들이는것은

용휘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세상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디엔가의 용휘를 위하여

이 글로나마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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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신청합니다 꼭 가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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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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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방에서, 이 거리에서 .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게 아닐까 하고. (p19)

 

그즈음 나는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의 컴퓨터 학과였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고작 자판치는 것밖에 몰랐지만,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그즈음 내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대학에 갔다. 막연하게 국문과에 가고, 막연하게 사대에 가고, 막연한 열패감이나 우월감을 갖고 졸업을 하고 진학을 했다.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 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 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 누군가의 이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라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p21)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 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지 7년이 다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방송을 들으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p118)

 

내가 강사직을 그만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땐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내 성적은 항상 4.0이 넘었고 토익점수도 900점 이상이었다. 나는 성격도 원만했고 나름대로 창의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처음 서류 심사에 떨어졌을때 '원래 몇번씩은 다들 떨어진다잖아?' 생각했다. 그다음 떨어졌을때 '혹시 자격증이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싶어 운전면허를 땄다. 또 한번 떨어졌을땐 '혹시 내 인상이 안좋나?' 해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열번 넘게 낙방하자 나는 혹시 내 전공이 국문학이기 때문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자 영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말했다. "영문과도 마찬가지야. 요새 영어는 아무나 하거든" 철학과에 다니는 친구는 말했다. "그래도 네가 나보단 낫지 않니?" 그말을 똑같이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하자 그는 꽁초를 힘껏 빨며 웅얼거렸다."그것도 옛날 얘기지. 요샌 고시도 잘사는 집 애들이 잘붙어. 장거리 경주라 누가 뒤를 받쳐줘야 하거든" 한 스무번쯤 떨어졌을 땐 '내가 너무 눈이 높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작지만 건실한 회사에 부지런히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여 서른번째 낙방을 했을 즈음, 나는 머리통을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정말 나는 괴물이 아닐까?"

시험을 준비하며 여러 노력을 했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대기업 인사과장이 올려놓은 모범답안을 정독했다.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모범 답안자는 자기소개서를 잘 쓴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p121)

 

"이거야 원 콘텐즈가 없어. 콘텐츠가.."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1년째 공기업을 준비하던 선배는 커피를 사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물었다.

"저기, 여자는 면접때 인성을 본다던데"

선배는 무릎나온 '추리닝'바지의 보풀을 뜯어내며 말했다.

"인마, 여자는 얼굴이 인성이지"

나는 공손하게 커피를 내밀었다.

"선배, 콘텐츠는..?"

선배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더니 "어떻게 만들긴.돈으로 만들지"라고 말한뒤 삼선 슬리퍼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p122)

 

k-59 오래전 내 책상번호.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p147)

 

2005년 가을 사라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다리 량(粱)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지나가기만'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p148)

 

언니가 방문을 딴다. 방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평 남짓해보이는 공간위로 창문과 책걸상이 보인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한쪽 국석에는 언니가 가져온 세간이 옹기종기 쌓여있다. 가장 많은게 책이고 나머지는 세제.두루마리 화장지.이불.실내화.우산 등이다. 거처를 자주 옮기는 동안 짐을 최소화 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겠지만 언니가 가진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점점 작아져간 탓이리라.(p201)

 

김애란 -침이 고인다 中

 

 

현실을 너무 덤덤하게, 그러면서도 위트있게 풀어낸 점이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싶다. 처음 책을 들고 보았을때 참..정말 글을 잘 썼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매끄러운 문장은, 적당한 현실과 적당한 환상적인 비유를 들어 저절로 그 문장의 장면 하나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듯 다시 도-하고 소리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채 굳어있었다. (책의 첫 부분 발췌)

 

내가 한국소설을 외국 소설보다 더 좋아하고 잘 읽는 이유는 한국소설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 소설은 그냥 그 글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인데 비해 (특히 요즘소설...감동이 오기엔 조금 무리다 싶은 느낌이다... 물론 아주 유명한 소설은 그것을 넘어섰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린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위대한 개츠비 등등..) 우리나라 소설은 한 장면이 아릿하게 다가와 계속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의 경우엔 눈길 이란 단편소설속의 눈길을 묘사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 딱히 재밌지 않다 하더라도 그 소설 속 장면의 하나가 내 마음을 울리는 힘. 그런것을 가진게 한국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신림과 노량진을 내가 바람이 되어 그 곳을 지나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가 현재 신림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마음편히 볼수만은 없었다. 솔직히 눈물이 났다. 1차의 슬럼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걸 보면 말이다..그런데 이 소설은 그러한 허한 내 마음속을 쿡 찌르고 들어와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침이 고인다 파트는 혼자인 것에 익숙한 사람이 다른 이와 함께 하는 과정속에서 거쳐가는 심리적인 과정을 꽤 자세하게 나타내었다. 미묘한 그 심리를 딱히 찝어서 이건 이런거다-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닌데, 그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품었던 그 감정을 잘 풀어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함께인것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것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이내 시일이 지나면 그것이 일상이 되면서 그 사람의 단점을 먼저 찾게 되고 처음에 느꼈던 그 감정들은 사라지고 없는것. 그 과정을 잘 나타내었다.

 

그리고 플라이데이터레코드파트는 이 단편소설들 중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많이 이끌어낸 소설이 아닐까 싶다. 섬에 사는 소년이 블랙박스를 자신의 엄마로 여기게 되는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상상을 하실까 싶을정도로 기발하고 재밌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가슴이 먹먹한..가장 인상깊게 읽은 소설이었다. 삼촌의 배려와 할아버지의 겉으로는 엄하지만 마음속의 그 따뜻함. 어머니에 대한 소년의 그리움.... 갑자기 동요 섬집아기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아, 이 소설에서 인상이 깊었던건 생굴에서 그늘 맛이 났다는 구절이었다. 아...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싶었는데 그늘맛이라..정말 표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집이 말하고 싶은건 나만의 방-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이 필요하다는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본다면 생각보다 물리적으로 해결이 안된 경우도 많고, 또한 해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자신에게 하나의 방이 존재하는가 생각한다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외부의 생각으로 인해 나 자신의 마음의 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살고 있는것 같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이러다가 영영 마음의 소리를 못듣고 살게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유지하기는 힘들겠지만 잠시나마 그러한 여유를 준 김애란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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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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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마리도 못잡았다.

 

그는 사람*.인***에서 몇장의 이력서로 혼자 취직준비를 하는 취준생이었다. 팔십사일동안 그는 서류전형과 면접에서 한번도 최종합격을 못하였다.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구절이다. 그래, 이건 노인과 바다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특히 취준생에게는) 취준생과 바다 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산 것은, 시험이 끝나고 나서였다.

나는 행정고시를 보았었고

2년이 되던 해 떨어진 뒤, 고시를 접은 상태가 되었다.

그때 이 책을 집어들었다.

 

무슨 마음인진 모르겠지만, 바다 한가운데에 돛단배와 노인의 아련한 뒷 모습은, 나와 같다고도 생각했다.

 

'운이 다한것이다' '살라오'

 

나도 운이 다했나보다. 싶었다. 그래, 운이 다한것이다. 시험이란건 이제 지긋지긋해. 나에게 운이 다한걸꺼야.

 

새로운 길목에 들어서기 전 이 책을 꼭 봐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았다.

 

사실, 내용은 청소년기 시절, 읽었던것과 다름없고, 지루하기도 매한가지였다.

솔직히 내용은 끝없는 도전과 허탕의 과정같아서, 그게 남같지 않아서 더 보고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보다 달라진건, 좀 더 눈에 띄는 구절구절이 늘어났다는 것.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다만 더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을 테니까.

 

 

이 글을 읽고 나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운이 없다고 치자. 내일이면 모르는것이다. 내일의 운이 또 나타날지도. 다만 그 운이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게, 너무 당황해서 놓치지 않게 운이 없을때에도 준비는 확실히 해 놓아야 한다는걸 , 이렇게 보여주다니!

 

결국 그렇게 꾸준히 운이 도래할 '그날'만을 기다리며 꾸준히 낚싯줄을 드리우고 기다리던 노인은, 큰 물고기(청새치라고도 하고, 티뷰론이라고도 하지만 결국엔 중요한건 물고기 종류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이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를 잡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의 습격으로 5.5미터길이의 뼈만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이 소설에서의 재미는, 아무래도 큰 줄거리인 바다에 나가 청새치를 잡는다는 이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노인이 혼자서 독백을 하는 장면, 만새기와 휘파람새 등에게 말을 거는 장면, 그러한 장면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무언가 와닿게 하는 감동을 불러일으켜준다.

그리고 노인이 자연에게 한마디 한마디 건네는 말들은, 왠지 나에게 하는 말 같아 더욱 더 마음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푹 쉬어라 작은 새야" 그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노인이 휘파람새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소설 속 휘파람새보다 감동을 받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이제 꿋꿋하게 도전하며 나답게 살아야지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한번씩 고비를 맞이했다고 느껴질 때

더이상 앞으로 나갈 힘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운이 다했다고 느껴질 때

 

사자꿈을 꾸는 노인과 같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시 올지 모르는 운이 도래할 날을 고대하며,

이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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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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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비단 공산주의의 문제만은 아닐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독재주의,사회주의 외 모든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모티브로 삼는 모든 집단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며 그 집단 뿐만 아니라 어쩌면 모든 인간이 모이면 생기는 집단이라면 유발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는 체제에 순응했고 체제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했으며 타인의 고통에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그 체제에 얽혀 스스로 ‘침묵속에 죽을 것’을 택하게 된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상이 먼저인가 당원이 먼저인가

혁명이 먼저인가 윤리가 먼저인가.


아마도 그것들은 물과 기름처럼 맞붙어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맞붙은 채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국엔 악수 할 수 없는 거울속 친구를 둔 것처럼.

-

그는 한때 혁명의 주요세력이자 넘버 원의 측근 인물이었다. 그 혁명의 세력이 주요세력이 되고 넘버원이 한 나라를 한 체제를 이끌게 되면서 주인공 루바쇼프는 자신이 믿는 그 체제에 의해서 같은 당원들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고 여러 당원들을 만나게 된다. 주요세력이 되면서 당은 점점 체계적으로 변해가고 그 속에서 수많은 당원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체제와 당은 하나의 생각을 원했기에 루바쇼프는 그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품어본적 없다.

 ‘혁명가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게 아닐까? 만약 자신을 모든 다른 사람과 동일시한다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어디서 행동의 동기를 찾을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진 루바쇼프는 결국 자신을 늑대들에게 넘기지 말라고 부탁하던 리하르트를 제거하고, 리틀뢰비를 내부 조사한뒤 보고하였으며 -결국 그는 스스로 자살하게 되었다-자신을 따랐었던 알로바를 배신하여 그녀가 사형을 맞게 하였고 키퍼교수마저도-의도한것은 아니지만-처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연 당의 시점대로 반역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이었는가? 그 시절 루바쇼프는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간주관적 시점에서 그는 이미 그들을 ‘반역인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틀뢰비를 만났을적부터 그는 약간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과연 리틀뢰비는 당의 잠재적 반역자인가? 당이 기존의 당의 이상향에 오히려 반역을 꾀하는것은 아닌가? 그는 명을 받을때마다 철저하게 그들을 제거했고, 또한 절대로 쉬지도 않고 다른 해외임무를 지원했다. 그것은 일이 즐거워서가 아닌, 당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도 아닌, 어쩌면 윤리라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자신이 정착할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는 넘버원의 명 ,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명을 내렸는지도 잘 모르지만 당의 명을 받고 자신보다 밑에서 당을 위해 일하던-비록 그들의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그들을 죽음의 안개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오히려 당의 숙청의 대상에 포함되게 되었다. 그것이 자신이 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친구였던 이그노프가 그를 대상으로 조사를 맡고 , 자신이 그 실험대상이 되어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것인가.

그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서 또한 자신의 과거 속으로도 들어가게 된다. 앞을 보고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과거들, 과거의 사람들, 자신이 처분했던 당원들과의 개인적인 교류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만나게 된 인물들, 옆방의 402호와 406호에 머물렀던 여러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당 체제의 하수인과 같은 글레트킨까지.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새로운 미래의 세대까지 맞이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는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이 책의 구성과도 관련이 있다.

 

첫 번째 심문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이 당의 반역인물로 포함될 것이란것도 어림짐작 하고 있었다. (그이유는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혁명에 참가했고 당의 출발또한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렇게 출발하여 지금까지 존재하고 세력을 키운 당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의 체제에 충성을 보이면서도 또한 당의 문제점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또한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도 난 또 그렇게 할거야. 그건 필요한 일이고 또 옳은 일이었어. 당신들에게 내가 빚을 진건가? 올바르고 필요한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인가?”
 

“올바른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이성 이외에 또 다른 척도가 있는가? 다른 척도로 잰다면 올바른 사람이 가장 무거운 빚을 진 셈인가? 그 빚은 두배가 될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뭘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과거 자신의 동지였기도 했던 이바노프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동지가 아니라 조사관과 피 조사자가 되어.
 

처음에는 루바쇼프의 과거를 이야기 하고 그 다음은 당의 존재에 당의 가치에 대해 논하게 된다. 당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당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대중은 포함되는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그무엇도 일치하는 의견을 낼 수 없었고 그저 한가지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당은 한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한가지 처벌, 즉 죽음만 알았다.


두 번째 심문

처음으로 서술된 그의 일기에서는 그가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 대해 자신이 믿어왔던 체제와 당에 대한 회의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일기를 끝맺었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배한 이유이다.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는 점차 자신에 대해 더 고뇌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는 자신과 감옥, 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는것이 없었기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만이 무한히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과거의 알로바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배신으로 죽게된 알로바의 죽음은 그에게 어떠한 추상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추상적 사건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사건으로 몸에 와닿는 사람과 사람과의 감정적인 배신과 슬픔의 사건이었다는걸 느끼게 해 준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동료였던 ‘보그노프’를 처형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보그노프는 큰 교류를 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망명시절동안 같은 방을 쓴 동료였으며 편지에는 항상 ‘무덤까지 충실할 당신의 동지, 보그로프’라는 말을 써넣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는 루바쇼프의 방을 지나 처형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데 그는 끝까지 루바쇼프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처형대로 끌려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바쇼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던 자신이 배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알로바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그 외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던 당원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그에게 이바노프는 말한다.

 “내게 연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네를 홀로 내버려 둘거야. 그러나 난 연민이 털끝만치도 없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자네도 알다시피 한동안 나는 진통제를 복용했네, 하지만 지금까지 연민이라는 악덕은 용케 피해왔지. 연민은 극소량으로도 우릴 피폐하게 만드니까. (중략)..”

“(중략)..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은 정치윤리의 유일한 규범이고 앞으로도 그럴걸세.”

 그리고 루바쇼프는 이렇게 대꾸한다.

"난 살가죽이 벗겨진 이 세대의 몸을 보네. 그러나 새피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역사를 물리학의 한 실험처럼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차이가 있다면 물리학에서 실험은 수천번 반복할 수 있지만 역사에서는 단 한번만 일어난다는 것이지. 당통과 생쥐스트는 처형대로 단 한번 보내질수 있을 뿐이네. 만약 대잠수함이 결국 옳은것이라고 판명이 난다 해도 보그로프동지는 다시 살아날 수 없겠지”

세 번째 심문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훨씬 명예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남은것은 명예밖에 없었다.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도덕적 기준이 사회적 유용성이기 때문에 당원으로 남기위해 자기 확신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것은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돈키호테적 행동보다는 분명 훨씬 명예롭다. 개인적 자존심의 문제, 즉 자기비하를 싫어하는 편견이나 피로와 역겨움 및 부끄러움의 개인적 감정들은 뿌리와 가지에서 잘라내야 한다.

그가 생각하는 명예는 이성으로 대체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잘못을-사실 무엇이 정확한 잘못인지도 모르지만-인정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당의 치밀한 체계속에서 새로이 자라난 새로운 세대인 글레트킨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조사의 과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논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도 조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처음 글레트킨은 말 그대로 체제에 복종하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인물이지만 자신의 윗세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존재했던 인물인 루바쇼프를 대하게 되면서 루바쇼프의 시점에서는 -실제 글레트킨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가 조금은 변화했음을 느낀다.

끊임없는 조사와 대화, 잠도 못자게 하면서 극심한 피로속에서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을 묻고 답하는 과정은 루바쇼프에겐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키퍼교수의 언청이 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또 다른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언청이 아들은 진정 루바쇼프를 반역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반역을 주도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 시절 그들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이 만들어놓은 각본대로 흘러가면 자신의 고통을 조금은 덜 부담하게 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글레트킨은 말한다.

“새로운 혁명의 물결을 받아들일만큼 세계가 성숙하려면 10년 혹은 20년 어쩌면 5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걸 그는 깨달았소. 그때까지 우린 홀로 견딜거요. 그때까지 우린 오직 한가지 의무만을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

“당신 임무는 간단하오. 그걸 스스로 하는거요. 즉 옳은것은 보기좋게 도금하고 틀린것은 검게 칠하는 거요. 반대파 정책은 틀렸소. 그러므로 당신 임무는 반대파를 경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오. 반대행위는 하나의 죄악이며 반대파 지도자들은 죄인이라고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겁니다. 대중이 이해하는 간단한 언어는 그것이오. 만약 복잡한 동기를 말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혼라만 야기할 거요. 시민 루바쇼프 당신의 임무는 동정과 연민을 이깨우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반대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이 나라에 위험할 뿐이오. 루바쇼프 동지 난 당이 당신에게 부여한 임무를 이해했으면 하오”

 루바쇼프는 글레트킨의 수많은 이야기 중 저 이야기, 마지막 구절의 동지 라는 단어에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물결이 머릿속에 이는 것을 느낀다. 그는 그토록 당에 충성했고 반역인물로 몰리는 그 순간마저도 자신을 동지로 부르는 그 한마디에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슬픔과 묘한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그는 당에 , 체제에 순응했고 그것이 삶이었다. 삶의 일부가 아닌 삶 자체가 당이었다.

문법적 허구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신문기사로 새로운 세대에게 반역인물로써 읽히고 있었다. 한때 루바쇼프를 추종했던 문지기 바실리 또한 그의 딸이 읽는 신문 속에서 루바쇼프의 반역죄 내용과 그 결말까지 씁쓸하게 듣고 있었다. 그의 딸은 루바쇼프가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던 그의 말처럼, 그의 딸은 아무 의심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신문을 읽고만 있었다. 아버지인 그는 딸이 루바쇼프의 사진을 떼어 버려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바노프 루바쇼프 키퍼무리들은 사라졌고 바실리는 수치심을 견디기에 너무 늙어버렸기에. 
 

죽음을 목전에 둔 루바쇼프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한번도 ‘나’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두드린적이 없었다. 아니 전혀 두드리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죽음 앞에서 ‘나’를 벽에 계속 두드렸다. 대답해줄 사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미있는 고통과 의미없는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사회적 기원을 가진 고통은 우발적이고 효과도 없으며 무의미 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혁명은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을 철폐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무의미한 고통을 철폐하기 위해선 의미있는 고통인 생물학적 재난으로 인한 고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러한 (무의미한)고통의 제거 작업이 정당했는가?

‘인류’라는 추상물 속에서 말한다면 그건 명백히 정당했다. 그러나 ‘인간’개인에게 적용한다면 그래서 뼈와 피와 살가죽을 가진 실재적 인간 존재인 ‘2-4’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눈을 목표물에 두고 손에 칼을 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실험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아마도 훗날 어느날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인간은 미숙하고 너무 서툴렀다.실험의 위대한 마당, 자유의 요새이자 혁명의 조국에서 날뛴 꼴이라니.

글레트킨은 이 요새를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행한 일은 모두 옳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누구도 콘크리트로 낙원을 세울 수는 없다. 요새는 보존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메시지도 세상에 보여줄 본보기도 없었다.
 

“넌 대체 무얼 위해 죽고 있는 것이지?”
그는 어떠한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온 원칙,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모든 관습은 배 밖으로 던져버렸다.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윤리라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아마도 악의 중심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류가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것은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성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은 불완전하기에 목표가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뒤틀린 경로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먼 훗날에야 비로소 새로운 깃발과 함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경제적 숙명성’과 ‘대양적 감정’을 모두 아는 새정신이 일어나리라. 아마도 새로운 당의 당원들은 수도사옷을 걸칠테고 오직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전도할 것이다..

결국 그는 목표물을 보지 못한채, 사막과 밤의 어둠만을 본 채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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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읽고 난뒤, 처음 든 생각은 이 문제는 이 상황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공산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그 어둠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쾨슬러는 공산주의를 체험했고 그 부조리를 목격했지만 나의 세대에는 공산주의 뿐만이 아닌 자본주의를 체험하고 그 부조리를 목격했다. 공산주의는 모든 체제상의 과오를 죽음으로 결론냈다는 점에 있어 훨씬 지금보다 더 비 인간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융통성이 없는 체제였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루바쇼프가 겪는 갈등은 어떠한 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세계, 특히 집단을 이루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참극인 것이었다.

 모든 이념은 순수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과정에서 새하얀 눈이 밟혀 검은 눈물이 되듯이, 그렇게 더럽혀져 간다. 그 더럽힘의 주역은 그 혁명을 주도했던 인간들이었고 그 당원들이었으며 어쩌면 그것을 무관심, 혹은 방관했었던 일반 대중인지도 모른다.

윤리란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통해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입증이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이 시작되었던 자본주의 물결에서는 그 윤리라는 바닥짐이 존재하였는가?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 시킨다고 가르쳤는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나름 주역이라고 일컬을만한 사람들은 어떠한 일들을 해왔는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체제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하며 살아왔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수 있게 만들어준 소설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모든 체제와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인간이었고, 인간에서 비롯되었으며 , 인간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떤 시대가 도래하고 도래하였대도 그 상황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을 많은 다른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 같은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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