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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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비단 공산주의의 문제만은 아닐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독재주의,사회주의 외 모든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모티브로 삼는 모든 집단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며 그 집단 뿐만 아니라 어쩌면 모든 인간이 모이면 생기는 집단이라면 유발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는 체제에 순응했고 체제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했으며 타인의 고통에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그 체제에 얽혀 스스로 ‘침묵속에 죽을 것’을 택하게 된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상이 먼저인가 당원이 먼저인가

혁명이 먼저인가 윤리가 먼저인가.


아마도 그것들은 물과 기름처럼 맞붙어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맞붙은 채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국엔 악수 할 수 없는 거울속 친구를 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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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혁명의 주요세력이자 넘버 원의 측근 인물이었다. 그 혁명의 세력이 주요세력이 되고 넘버원이 한 나라를 한 체제를 이끌게 되면서 주인공 루바쇼프는 자신이 믿는 그 체제에 의해서 같은 당원들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고 여러 당원들을 만나게 된다. 주요세력이 되면서 당은 점점 체계적으로 변해가고 그 속에서 수많은 당원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체제와 당은 하나의 생각을 원했기에 루바쇼프는 그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품어본적 없다.

 ‘혁명가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게 아닐까? 만약 자신을 모든 다른 사람과 동일시한다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어디서 행동의 동기를 찾을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진 루바쇼프는 결국 자신을 늑대들에게 넘기지 말라고 부탁하던 리하르트를 제거하고, 리틀뢰비를 내부 조사한뒤 보고하였으며 -결국 그는 스스로 자살하게 되었다-자신을 따랐었던 알로바를 배신하여 그녀가 사형을 맞게 하였고 키퍼교수마저도-의도한것은 아니지만-처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연 당의 시점대로 반역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이었는가? 그 시절 루바쇼프는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간주관적 시점에서 그는 이미 그들을 ‘반역인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틀뢰비를 만났을적부터 그는 약간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과연 리틀뢰비는 당의 잠재적 반역자인가? 당이 기존의 당의 이상향에 오히려 반역을 꾀하는것은 아닌가? 그는 명을 받을때마다 철저하게 그들을 제거했고, 또한 절대로 쉬지도 않고 다른 해외임무를 지원했다. 그것은 일이 즐거워서가 아닌, 당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도 아닌, 어쩌면 윤리라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자신이 정착할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는 넘버원의 명 ,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명을 내렸는지도 잘 모르지만 당의 명을 받고 자신보다 밑에서 당을 위해 일하던-비록 그들의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그들을 죽음의 안개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오히려 당의 숙청의 대상에 포함되게 되었다. 그것이 자신이 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친구였던 이그노프가 그를 대상으로 조사를 맡고 , 자신이 그 실험대상이 되어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것인가.

그는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서 또한 자신의 과거 속으로도 들어가게 된다. 앞을 보고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과거들, 과거의 사람들, 자신이 처분했던 당원들과의 개인적인 교류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만나게 된 인물들, 옆방의 402호와 406호에 머물렀던 여러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당 체제의 하수인과 같은 글레트킨까지.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새로운 미래의 세대까지 맞이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는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이 책의 구성과도 관련이 있다.

 

첫 번째 심문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이 당의 반역인물로 포함될 것이란것도 어림짐작 하고 있었다. (그이유는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혁명에 참가했고 당의 출발또한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렇게 출발하여 지금까지 존재하고 세력을 키운 당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의 체제에 충성을 보이면서도 또한 당의 문제점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또한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도 난 또 그렇게 할거야. 그건 필요한 일이고 또 옳은 일이었어. 당신들에게 내가 빚을 진건가? 올바르고 필요한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단 말인가?”
 

“올바른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이성 이외에 또 다른 척도가 있는가? 다른 척도로 잰다면 올바른 사람이 가장 무거운 빚을 진 셈인가? 그 빚은 두배가 될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뭘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과거 자신의 동지였기도 했던 이바노프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동지가 아니라 조사관과 피 조사자가 되어.
 

처음에는 루바쇼프의 과거를 이야기 하고 그 다음은 당의 존재에 당의 가치에 대해 논하게 된다. 당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당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대중은 포함되는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그무엇도 일치하는 의견을 낼 수 없었고 그저 한가지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당은 한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한가지 처벌, 즉 죽음만 알았다.


두 번째 심문

처음으로 서술된 그의 일기에서는 그가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 대해 자신이 믿어왔던 체제와 당에 대한 회의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일기를 끝맺었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배한 이유이다.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는 점차 자신에 대해 더 고뇌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는 자신과 감옥, 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는것이 없었기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만이 무한히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과거의 알로바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배신으로 죽게된 알로바의 죽음은 그에게 어떠한 추상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추상적 사건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사건으로 몸에 와닿는 사람과 사람과의 감정적인 배신과 슬픔의 사건이었다는걸 느끼게 해 준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동료였던 ‘보그노프’를 처형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보그노프는 큰 교류를 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망명시절동안 같은 방을 쓴 동료였으며 편지에는 항상 ‘무덤까지 충실할 당신의 동지, 보그로프’라는 말을 써넣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는 루바쇼프의 방을 지나 처형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데 그는 끝까지 루바쇼프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처형대로 끌려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바쇼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던 자신이 배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알로바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그 외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던 당원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그에게 이바노프는 말한다.

 “내게 연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네를 홀로 내버려 둘거야. 그러나 난 연민이 털끝만치도 없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자네도 알다시피 한동안 나는 진통제를 복용했네, 하지만 지금까지 연민이라는 악덕은 용케 피해왔지. 연민은 극소량으로도 우릴 피폐하게 만드니까. (중략)..”

“(중략)..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은 정치윤리의 유일한 규범이고 앞으로도 그럴걸세.”

 그리고 루바쇼프는 이렇게 대꾸한다.

"난 살가죽이 벗겨진 이 세대의 몸을 보네. 그러나 새피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역사를 물리학의 한 실험처럼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차이가 있다면 물리학에서 실험은 수천번 반복할 수 있지만 역사에서는 단 한번만 일어난다는 것이지. 당통과 생쥐스트는 처형대로 단 한번 보내질수 있을 뿐이네. 만약 대잠수함이 결국 옳은것이라고 판명이 난다 해도 보그로프동지는 다시 살아날 수 없겠지”

세 번째 심문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훨씬 명예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남은것은 명예밖에 없었다.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도덕적 기준이 사회적 유용성이기 때문에 당원으로 남기위해 자기 확신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것은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돈키호테적 행동보다는 분명 훨씬 명예롭다. 개인적 자존심의 문제, 즉 자기비하를 싫어하는 편견이나 피로와 역겨움 및 부끄러움의 개인적 감정들은 뿌리와 가지에서 잘라내야 한다.

그가 생각하는 명예는 이성으로 대체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잘못을-사실 무엇이 정확한 잘못인지도 모르지만-인정하기로 한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당의 치밀한 체계속에서 새로이 자라난 새로운 세대인 글레트킨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조사의 과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논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도 조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처음 글레트킨은 말 그대로 체제에 복종하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인물이지만 자신의 윗세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존재했던 인물인 루바쇼프를 대하게 되면서 루바쇼프의 시점에서는 -실제 글레트킨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가 조금은 변화했음을 느낀다.

끊임없는 조사와 대화, 잠도 못자게 하면서 극심한 피로속에서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을 묻고 답하는 과정은 루바쇼프에겐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키퍼교수의 언청이 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또 다른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언청이 아들은 진정 루바쇼프를 반역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반역을 주도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 시절 그들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당이 만들어놓은 각본대로 흘러가면 자신의 고통을 조금은 덜 부담하게 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글레트킨은 말한다.

“새로운 혁명의 물결을 받아들일만큼 세계가 성숙하려면 10년 혹은 20년 어쩌면 5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걸 그는 깨달았소. 그때까지 우린 홀로 견딜거요. 그때까지 우린 오직 한가지 의무만을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

“당신 임무는 간단하오. 그걸 스스로 하는거요. 즉 옳은것은 보기좋게 도금하고 틀린것은 검게 칠하는 거요. 반대파 정책은 틀렸소. 그러므로 당신 임무는 반대파를 경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오. 반대행위는 하나의 죄악이며 반대파 지도자들은 죄인이라고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겁니다. 대중이 이해하는 간단한 언어는 그것이오. 만약 복잡한 동기를 말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혼라만 야기할 거요. 시민 루바쇼프 당신의 임무는 동정과 연민을 이깨우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반대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이 나라에 위험할 뿐이오. 루바쇼프 동지 난 당이 당신에게 부여한 임무를 이해했으면 하오”

 루바쇼프는 글레트킨의 수많은 이야기 중 저 이야기, 마지막 구절의 동지 라는 단어에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물결이 머릿속에 이는 것을 느낀다. 그는 그토록 당에 충성했고 반역인물로 몰리는 그 순간마저도 자신을 동지로 부르는 그 한마디에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슬픔과 묘한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그는 당에 , 체제에 순응했고 그것이 삶이었다. 삶의 일부가 아닌 삶 자체가 당이었다.

문법적 허구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신문기사로 새로운 세대에게 반역인물로써 읽히고 있었다. 한때 루바쇼프를 추종했던 문지기 바실리 또한 그의 딸이 읽는 신문 속에서 루바쇼프의 반역죄 내용과 그 결말까지 씁쓸하게 듣고 있었다. 그의 딸은 루바쇼프가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던 그의 말처럼, 그의 딸은 아무 의심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 신문을 읽고만 있었다. 아버지인 그는 딸이 루바쇼프의 사진을 떼어 버려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바노프 루바쇼프 키퍼무리들은 사라졌고 바실리는 수치심을 견디기에 너무 늙어버렸기에. 
 

죽음을 목전에 둔 루바쇼프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한번도 ‘나’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두드린적이 없었다. 아니 전혀 두드리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죽음 앞에서 ‘나’를 벽에 계속 두드렸다. 대답해줄 사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미있는 고통과 의미없는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사회적 기원을 가진 고통은 우발적이고 효과도 없으며 무의미 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혁명은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을 철폐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무의미한 고통을 철폐하기 위해선 의미있는 고통인 생물학적 재난으로 인한 고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러한 (무의미한)고통의 제거 작업이 정당했는가?

‘인류’라는 추상물 속에서 말한다면 그건 명백히 정당했다. 그러나 ‘인간’개인에게 적용한다면 그래서 뼈와 피와 살가죽을 가진 실재적 인간 존재인 ‘2-4’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눈을 목표물에 두고 손에 칼을 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실험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아마도 훗날 어느날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인간은 미숙하고 너무 서툴렀다.실험의 위대한 마당, 자유의 요새이자 혁명의 조국에서 날뛴 꼴이라니.

글레트킨은 이 요새를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행한 일은 모두 옳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누구도 콘크리트로 낙원을 세울 수는 없다. 요새는 보존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메시지도 세상에 보여줄 본보기도 없었다.
 

“넌 대체 무얼 위해 죽고 있는 것이지?”
그는 어떠한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온 원칙,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모든 관습은 배 밖으로 던져버렸다.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윤리라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아마도 악의 중심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류가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것은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성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은 불완전하기에 목표가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뒤틀린 경로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먼 훗날에야 비로소 새로운 깃발과 함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경제적 숙명성’과 ‘대양적 감정’을 모두 아는 새정신이 일어나리라. 아마도 새로운 당의 당원들은 수도사옷을 걸칠테고 오직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전도할 것이다..

결국 그는 목표물을 보지 못한채, 사막과 밤의 어둠만을 본 채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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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읽고 난뒤, 처음 든 생각은 이 문제는 이 상황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공산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그 어둠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쾨슬러는 공산주의를 체험했고 그 부조리를 목격했지만 나의 세대에는 공산주의 뿐만이 아닌 자본주의를 체험하고 그 부조리를 목격했다. 공산주의는 모든 체제상의 과오를 죽음으로 결론냈다는 점에 있어 훨씬 지금보다 더 비 인간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융통성이 없는 체제였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루바쇼프가 겪는 갈등은 어떠한 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세계, 특히 집단을 이루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참극인 것이었다.

 모든 이념은 순수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과정에서 새하얀 눈이 밟혀 검은 눈물이 되듯이, 그렇게 더럽혀져 간다. 그 더럽힘의 주역은 그 혁명을 주도했던 인간들이었고 그 당원들이었으며 어쩌면 그것을 무관심, 혹은 방관했었던 일반 대중인지도 모른다.

윤리란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통해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입증이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이 시작되었던 자본주의 물결에서는 그 윤리라는 바닥짐이 존재하였는가?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 시킨다고 가르쳤는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나름 주역이라고 일컬을만한 사람들은 어떠한 일들을 해왔는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체제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하며 살아왔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수 있게 만들어준 소설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모든 체제와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인간이었고, 인간에서 비롯되었으며 , 인간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떤 시대가 도래하고 도래하였대도 그 상황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을 많은 다른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 같은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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