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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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방에서, 이 거리에서 .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게 아닐까 하고. (p19)

 

그즈음 나는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다. 4년제 대학의 컴퓨터 학과였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고작 자판치는 것밖에 몰랐지만,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그즈음 내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대학에 갔다. 막연하게 국문과에 가고, 막연하게 사대에 가고, 막연한 열패감이나 우월감을 갖고 졸업을 하고 진학을 했다.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 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 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 누군가의 이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라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p21)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 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지 7년이 다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방송을 들으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p118)

 

내가 강사직을 그만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땐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내 성적은 항상 4.0이 넘었고 토익점수도 900점 이상이었다. 나는 성격도 원만했고 나름대로 창의적인 인간이라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처음 서류 심사에 떨어졌을때 '원래 몇번씩은 다들 떨어진다잖아?' 생각했다. 그다음 떨어졌을때 '혹시 자격증이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싶어 운전면허를 땄다. 또 한번 떨어졌을땐 '혹시 내 인상이 안좋나?' 해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열번 넘게 낙방하자 나는 혹시 내 전공이 국문학이기 때문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자 영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말했다. "영문과도 마찬가지야. 요새 영어는 아무나 하거든" 철학과에 다니는 친구는 말했다. "그래도 네가 나보단 낫지 않니?" 그말을 똑같이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하자 그는 꽁초를 힘껏 빨며 웅얼거렸다."그것도 옛날 얘기지. 요샌 고시도 잘사는 집 애들이 잘붙어. 장거리 경주라 누가 뒤를 받쳐줘야 하거든" 한 스무번쯤 떨어졌을 땐 '내가 너무 눈이 높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작지만 건실한 회사에 부지런히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여 서른번째 낙방을 했을 즈음, 나는 머리통을 감싸 안고 중얼거렸다.

"정말 나는 괴물이 아닐까?"

시험을 준비하며 여러 노력을 했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대기업 인사과장이 올려놓은 모범답안을 정독했다.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모범 답안자는 자기소개서를 잘 쓴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p121)

 

"이거야 원 콘텐즈가 없어. 콘텐츠가.."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1년째 공기업을 준비하던 선배는 커피를 사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물었다.

"저기, 여자는 면접때 인성을 본다던데"

선배는 무릎나온 '추리닝'바지의 보풀을 뜯어내며 말했다.

"인마, 여자는 얼굴이 인성이지"

나는 공손하게 커피를 내밀었다.

"선배, 콘텐츠는..?"

선배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더니 "어떻게 만들긴.돈으로 만들지"라고 말한뒤 삼선 슬리퍼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p122)

 

k-59 오래전 내 책상번호.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p147)

 

2005년 가을 사라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다리 량(粱)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지나가기만'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p148)

 

언니가 방문을 딴다. 방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평 남짓해보이는 공간위로 창문과 책걸상이 보인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한쪽 국석에는 언니가 가져온 세간이 옹기종기 쌓여있다. 가장 많은게 책이고 나머지는 세제.두루마리 화장지.이불.실내화.우산 등이다. 거처를 자주 옮기는 동안 짐을 최소화 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겠지만 언니가 가진 것,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점점 작아져간 탓이리라.(p201)

 

김애란 -침이 고인다 中

 

 

현실을 너무 덤덤하게, 그러면서도 위트있게 풀어낸 점이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싶다. 처음 책을 들고 보았을때 참..정말 글을 잘 썼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매끄러운 문장은, 적당한 현실과 적당한 환상적인 비유를 들어 저절로 그 문장의 장면 하나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듯 다시 도-하고 소리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채 굳어있었다. (책의 첫 부분 발췌)

 

내가 한국소설을 외국 소설보다 더 좋아하고 잘 읽는 이유는 한국소설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 소설은 그냥 그 글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인데 비해 (특히 요즘소설...감동이 오기엔 조금 무리다 싶은 느낌이다... 물론 아주 유명한 소설은 그것을 넘어섰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린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위대한 개츠비 등등..) 우리나라 소설은 한 장면이 아릿하게 다가와 계속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의 경우엔 눈길 이란 단편소설속의 눈길을 묘사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 딱히 재밌지 않다 하더라도 그 소설 속 장면의 하나가 내 마음을 울리는 힘. 그런것을 가진게 한국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신림과 노량진을 내가 바람이 되어 그 곳을 지나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가 현재 신림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마음편히 볼수만은 없었다. 솔직히 눈물이 났다. 1차의 슬럼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걸 보면 말이다..그런데 이 소설은 그러한 허한 내 마음속을 쿡 찌르고 들어와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침이 고인다 파트는 혼자인 것에 익숙한 사람이 다른 이와 함께 하는 과정속에서 거쳐가는 심리적인 과정을 꽤 자세하게 나타내었다. 미묘한 그 심리를 딱히 찝어서 이건 이런거다-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닌데, 그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품었던 그 감정을 잘 풀어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함께인것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것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이내 시일이 지나면 그것이 일상이 되면서 그 사람의 단점을 먼저 찾게 되고 처음에 느꼈던 그 감정들은 사라지고 없는것. 그 과정을 잘 나타내었다.

 

그리고 플라이데이터레코드파트는 이 단편소설들 중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많이 이끌어낸 소설이 아닐까 싶다. 섬에 사는 소년이 블랙박스를 자신의 엄마로 여기게 되는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상상을 하실까 싶을정도로 기발하고 재밌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가슴이 먹먹한..가장 인상깊게 읽은 소설이었다. 삼촌의 배려와 할아버지의 겉으로는 엄하지만 마음속의 그 따뜻함. 어머니에 대한 소년의 그리움.... 갑자기 동요 섬집아기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아, 이 소설에서 인상이 깊었던건 생굴에서 그늘 맛이 났다는 구절이었다. 아...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싶었는데 그늘맛이라..정말 표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집이 말하고 싶은건 나만의 방-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이 필요하다는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본다면 생각보다 물리적으로 해결이 안된 경우도 많고, 또한 해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자신에게 하나의 방이 존재하는가 생각한다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외부의 생각으로 인해 나 자신의 마음의 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살고 있는것 같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이러다가 영영 마음의 소리를 못듣고 살게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유지하기는 힘들겠지만 잠시나마 그러한 여유를 준 김애란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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