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경우에도 수수께끼를 풀려면 상상력과 직관이 필요하다. - P11
이런 혼돈은 불가피한 것이리라. 한 사람의 생의 연대기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선적일 수 없으니 말이다. 공백과 공동空洞, 메아리와 불분명한 경계. 이것들은 모든 기억이 그렇듯 모든 글쓰기의 구성 요소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그렇듯 책 속의 말들 역시하나의 균일한 덩어리가 아니다. 아무리 풍성한 말들이나 날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거대한 침묵을 배경 삼아 소진되지 않는 가능성과 암시와 문장의 군도를 그려놓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침묵은 순수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아서 나지막한 웅성임이끊임없이 들려온다. 과거의 끝에서 솟구치는 이 웅성임은 현재의 도처에서 모여든 웅성임과 뒤섞인다. 목소리들의 바람, 숨결들의 다성악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가만가만 들려온다. 세상과 타인들과 나 자신에 관한 뜻밖의 정보 를 전해주는 미심쩍은 목소리, 조금만 귀기울여도 들을 수 있는목소리다. 글을 쓴다는 것은 프롬프터박스로 내려가, 단어들 사이 혹은주위에서, 때로는 단어들 한복판에서, 언어가 침묵하며 숨쉬는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P13
그러나 어느 마술 같은 저녁에는 클레멘스가 방탕한 왕으로변신하기도 한다. 그가 아내나 만찬에 초대한 친구들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바흐나 쉬츠, 북스테후데, 슈베르트의 곡을 노래할때다. 그는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강렬한 황금색 빛줄기 속에꼿꼿이 버티고 서서 놀랄 만큼 유연한 베이스바리톤의 음성으로노래를 한다. 그의 입이 크게 열린다. 폭풍에 시달리는 태양이떨며 울부짖는 어둠의 심연이다. 빛이 그의 금속 안경테를 타고아롱거리며, 두 눈은 유리알 속에 녹아버린 듯 사라진다. 벗어진이마에 매부리코인 맨송맨송한 얼굴 또한 무슨 흰 금속으로 주조하거나 반죽으로 빚어놓은 듯하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합창대장이 썼던 준엄하게 반짝이는 가면 같다.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의 느린 동작을 허공에 대고 어렴풋이 재현한다. 작고 다부진두 손의 말끔히 다듬어진 손톱이 샹들리에 불빛 아래 반짝인다. - P22
아이는 숨을 죽이고 귀기울인다. 아버지의 강하고 부드러운숨결에 더 많은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서다. 어둠을 다스리는 주인의 목소리다. 아버지는 열병이라는 적을 때려눕힐 수 있었듯이 어둠의 위협적인 힘을 길들인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불러 자신의 치유를 돕는 것이라고, 유럽 전역에서 아버지를찾아온 무수한 환자들 역시 분명 그런 식으로 치료받고 있는 것이라고, 프란츠게오르크는 믿고 있다. 아이는 이 목소리의 고치로 자신을 감싼다. 그가 간혹 몸을 숨기는 거실의 자주색 벨벳커튼보다 더 치밀하고 관능적인 목소리다. 바로 이 목소리 때문에, 그 매혹적인 저녁 시간에 듣는 목소리때문에, 프란츠게오르크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무한히 존경한다. 아버지는 좀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아이에게는 상처였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버지의 노래는 고통을 달래기에 충분하며, 적어도 이 고통을 행복한 멜랑콜리로 바꾸어놓는다. 아버지는 냉담하지만, 그의 노래는 피난처 기쁨이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밤의 태양이 깃들어 있다. - P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