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경우에는 보통 생각보다는 감정에 강렬하게 사로잡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감정이 나에게설명되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 P96
이 기쁨, 나에게 가장 심오한 독서의 기쁨은 주로 주관적 글쓰기에서 비롯된다. 친밀감 혹은 짜릿함은 비평가가 중재자나 심판자 역할을 할 때는 전혀 찾아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치코 가쿠타니는나이 외로움을 조금도, 단 1밀리미터도 덜어 주지 못했다. 물론 이런평가 중심의 비평에는 스포츠와 비슷한 재미가 있고 이 비평은 행동의 언어로 설명된다. 중재자인 비평가는 어떤 일을 해낸다. 사랑받는작가를 넘어뜨린다. 무명의 작가를 끌어올린다. 이러한 비평을 읽는독자로서 나는 그 행동을 관람할 수 있어 충분히 즐겁다. 앞서 말했듯이 일종의 스포츠다. 하지만 이 사업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나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나의 반응과 감정에 연대해 주지는 않는다. - P96
우리 모두는 우리의 관점에 매여 있다. - P97
작품은 한 타입의 창작자(다시말해 남성)로부터 나와 그와 같은 타입의 독자(역시 남성)에게 전달된다. 이 창작자에게는 이상적인 관객이 있다. 그 관객에게도 이상적인 창작자가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양자 관계의 바깥에 자리하고있다.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역학 안에 포함되진 않는다. - P97
시켈은 앨런의작품을 대하는 여성의 반응이 남성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다루지 않는다. 여성의 반응이 중요할 것이라는 개념-여기서 잠깐 한숨 쉬고, 여자 반응이 중심 반응일 수도 있다는 개념은 이 비평가를 완전히 비껴간다. 책의 어떤 지점에서는 자기 세대가 키워 온 훌륭한 관용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기 세대는 "페미니즘까지도공감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타자화는 이 중재자가 자신의 관점이 실은 자신만의 극단적으로 제한된 주관성에 달려있음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관점이 지금 혹은 앞으로 비주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관점이 파이 전체가 아니라 그 파이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관성은 스스로에게 객관성을 부여하고 선언시켈 관점의 근원적 오류는 그가 오류의 가능성조차 떠올리지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P100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래서 작품에 가져온 것이무엇인지 인지하는 편이 좋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사람과 당신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편이 좋다. - P100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작고한 작가 랜들 케넌이 2019년 미시시피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나는 항상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겪은 순간과 상황, 그 이전에 우리를스쳐 간 순간과 상황에 복무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하고 싶다. 과연어떤 반응, 어떤 의견, 어떤 비평이 역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와 이력의 힘에 종속되어 있고 그 역사가 형성한 조건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역사를 초월한 주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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