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 아주 잘해, 불필요할 때일지라도 필요할 때 거짓말하는 것은 확실히 별로 가치가 없지. 나는 온종일 진실이라곤 한마디도말하지 않으면서 지낼 수도 있어. 작년에는 학교에서 거짓말 상까지 받았다니까." - P40

"거짓말" 내가 받아치는데 그녀는 일 초도 흔들림이 없다. 그저 태연자약하게 여세를 몰아 계속 떠들어댄다.
"논리학 시간에 우리는 2차방정식 거짓말을 학습해. 또한 미지수가둘인 1차방정식 거짓말도 공부하지. 그리고 가끔 여러 발성법으로 거짓말을 하는데, 무척 재미있어. 상급반으로 올라가면 미지수가 둘인2차방정식 거짓말과 3차방정식 거짓말을 다루는데, 좀 어려울 거야.
빨리 내년이 오면 좋겠어."
- P40

급기야 그녀는 정말이지 악마적이고, 훨씬 더 무시무시한 비정상 상태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과 관련한 남편의 기막힌 기억력, 이를테면 매달 말에 둘이서 가계부를 정리할 때 불가해한 속도로 암산 능력을 발휘하는 그의 모습은 블랑슈로 하여금 의심가득한 생각을 품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뭔가를 더 알고 싶어했고, 마키아벨리적인 계획을 품게 되었습니다………" - P47

"사랑, 그게 참 대단한 일을 하게 만들어요."
처음엔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확실히 짜증 섞인 어조로,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고 받아쳤다. 한데 가만 생각해보니.
소년의 그 말은 어차피 설명이 불가능해 보인다. 나 스스로도 이제 겨우 인정한 (터무니없을뿐더러, 그 자체가 비밀인) 사랑의 기대감을 저아이가 어찌 알겠는가? - P55

차가 굴러가는 동안,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의 부조리함을 또다시 생각해보았다. 다만 모든 걸 끝내버릴 결심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끈질긴 미련에 나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은근히 즐기면서도, 나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내가 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유일한 이유일 순 없었다. 물론 호기심이 작용하고는 있었다. 다른 무엇이 있을까? - P57

인도주의적 대업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불현듯 나의 경박함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고 있다! 그 이국적인 억양에 매료된 채, 입과 얼굴을 상상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웃는 얼굴일까? 아니면 조직의 우두머리로 행세하느라 잔뜩 무게를잡고 있을까?) 핵심을 놓쳤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정보에 집중해야할 것을 나는 말의 의미를 주워 담고 해석하는 대신, 그것의 단맛만을즐기고 있다.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에 관해 알고 싶어 그토록 조급해했으면서! - P64

그녀가 물리적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환상이 허물어진 지금,
나는 일 분 전까지만 해도 내 귀에 그토록 감미롭던 저 음악과의 모든접점을 잃어버렸다. 속임수가 발각되면서 연설의 마법 효과가 파기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빛을 잃어 차갑게 식어버린 거다. 녹음기의자기테이프가 지금은 공항 안내 방송에나 어울리는 중성적 음성으로낭독을 이어갈 뿐이다. 이제 문장을 알아듣거나 그 의미를 이해하는일이 더이상 어렵지 않다. - P66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노동의 요원한 결실(제조품, 서비스 또는 지적 연구)은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 존재합니다. 순전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면, 노동자는 자신이 수행한 노동의 총체적 형태도 최종적 용도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책임도 그에게 부과되지 않는 대신, 어떤 자부심도 그의 몫으로 돌아오지않습니다. 노동자는 거대한 생산 공정의 사슬에서 하나의 빈약한고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는 고립된 톱니이고,
개개의 부품에 세부적인 변형을 가할 뿐입니다. - P68

다시금 경계심이 엄습했다. 속임수로 치러지는 이 모임에 정체를알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위험이 배회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가짜 맹인들로 득실거리는 이 방은 내가 자진해서 걸려든 일종의 덫・・・・・ 가큼직한 안경테의 오른쪽 가장자리 아래로 간신히 확보한 좁은 틈새를통해, 나는 제일 가까이 서 있는 키 큰 금발머리 남자를 흘끔거린다.
제법 세련된 흰색 가죽점퍼 속에 새파란 스웨터를 받쳐 입은 사내......... - P69

그 역시 (방금 내가 알아챘는데) 맹인용안경테를 몇 밀리미터 삐딱하게 착용해 자기 왼쪽 방향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확신컨대, 결국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는데, 저쪽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이는걸로 봐서 그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충분히 공감의 미소로 여겨질 만한 입가의 움직임으로 그런 내 생각을 전달했다 - P70

그런데 별안간 발이 걸려 넘어지는 쪽은 소년이다. 내가 붙들어줄틈조차 없이 손을 놓치면서, 바로 앞에 털썩 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자칫 내가 몸이 먼저 나가 그와 함께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사뮈엘베케트의 인물들처럼 암흑 속을 함께 뒹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리되, 자세를 얼른 바로 한다. - P89

"모든 침대가 언젠가는 임종의 침상이지 않겠어요?" 들릴 듯 말듯작은 소리로 소녀가 중얼거렸다.  - P95

"정말 프랑스인답게 실증주의적이고 데카르트적으로 사고하시는군요・・・……… 하긴 당신이 며칠 뒤 처음으로‘ 이곳에 올 거라고 내가 말하긴했죠. 하지만 그뒤로는 자주 이곳에 나타날 겁니다. 심지어 당신은 이집에서 당신 부인과 자식들을 데리고 거주하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 사진이 그 벽에 걸려 있겠어요?" - P102

예술의 지향점이 각성과 자유에 있다면, 그 자유는 언어가 상상력을 장악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이 예술의 역설이다. 작위적 형식이야말로 삶의 신빙성이라는 족쇄에서 인간의 정신을 ‘충격적으로 해방하기 때문이다. 소설진은 그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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