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받아들여지건 아니건 간에 말할필요가 있는 것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 P10

많은 독자들은 내 논증을 기각하고 싶어 할 것이며 또 지나치게 성급하게 기각해 버릴 것이다. 인기 없는 견해를 거부할 때는 자신의 반응의 힘에 대하여 과도하게 확신을 갖기가 아주 쉽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정통 교설(orthodoxy)을 옹호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견해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 P10

아기를 가짐으로써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은 인간 삶의 너무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생각조차거의 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만들지 않아야 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만든다. 다시 말해서 출산은 보통 섹스하다 보니 나온 결과이지 사람을 존재케 하려는 결정의 결과가 아니다. 정말 아이를 갖기로 결정하는 이들은 여러 이유에서 그런 결정을 할지 모르나, 그런 이유들 가운데 잠재적 아이의 이익은 들어갈 수 없다. 결코 아이를 위해 아이를가질 수 없다. 여기까지는 이 책에서 내가 논하는 강한 견해 - 사람들을 존재케 함으로써 이득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명백할 수밖에 없다. - P18

각주

고기를 먹는 것을 방어하는 특별히 형편없는 논증 중 하나는 인간이 동물을 먹지 않는다면 그 동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그 경우 인간은 실제로 지금 번식시키는 것과 같은 수로는 그 동물을 번식시키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 주장은 비록 이 동물이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이 치르는 이 손실은 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득에 의해 능가된다고 하는 것이다.  - P19

비록 그들이 나를 존재케 하였지만, 나의 부모님께.
그리고 그들 각자의 존재가 비록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만,
나머지 우리들에게는 큰 이득이 되는 나의 형제들에게


헌사

선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많이 하면서도, 아이들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보장된 방법은 아이들을 애초에 존재하게끔 하지 않는 것이라는점을 알아채는 이들이 그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별난 일이다. 사람들이 이 점을 알아채지 못하고, 또는 설사 그것을 알아챈다고 하더라도그 깨달음을 따라 행위를 하지 않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내가보일 바와 같이 잠재적 아이들의 이익은 그 이유에 들어갈 수 없다. - P24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비록 어느 누구도 (nobody) 태어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운이 좋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 각자는 (everybody) 태어났을 정도로 충분히 불운하다.  - P25

친출생 편향은 많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결혼해서건 아13니면 그냥 동거해서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보며, 불임이 아니라면아이를 낳지 않는 건 퇴행적이거나(backward) 아니면 이기적이라고본다. 퇴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개체발생론적 패러다임이나 개인의 발달 패러다임을 활용한다. 즉 아이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하지만어른들은 낳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번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어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적절한 패러다임인지는 절대 명백하지 않다. 첫째로, 언제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할지를알고 이 앎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숙의 징표이지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다. 아이들을 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갖는 지나치게 많은 수의 청소년기) 아이들이 있다. 둘째 역시 첫째 논점과 관련되어 있다. 계통발생적인(phylogenetic) 관점에서 출산하려는 충동은 극도로 원시적이다. 만일 ‘퇴행적인‘이 ‘원시적인‘
으로 이해된다면, 출산하는 것이 퇴행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진화적으로 더 최근 일이고 더 진보된 일이다. - P28

몇몇 공동체에서는 아이를 낳으라는, 때로는 심지어 최대한 많은아이를 낳으라는, 동료의 압력을 비롯한 사회적 압력이 상당히 높다.
부모가 자신들이 낳는 많은 수의 아이들을 적절하게 보살필 능력이없을 때조차도 그런 압력이 있다."
압력이 항상 비공식적인 것도 아니다. 정부는 드물지 않게 꼭 그런경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출산율이 하락할 때 출산을 독려하기 위해서 개입한다. 이미 인구가 많은데도 그 인구의 대체율 이하로 출산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우려하며 정부 개입이 이루어지기도한다. 여기서 우려라는 건 노동 연령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게될 것이고 그러면 더 많아진 노인 인구를 먹여 살릴 납세자가 적어질것이라는 우려다.  - P29

친출생주의가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은 심지어 (단순히 정치적인영역이 아니라) 도덕적인 영역에서도 번식자들은 아이를 가짐으로써자신들의 가치를 높인다는 것이다. 부양가족이 있는 부모를 어떤 이유에선지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긴다. 예를 들어 희소한 자원이 있고,
예를 들어 기증된 콩팥이 있고, 잠재적 수혜자가 두 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어린아이들의 부모이고 한 명은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정이 동일할 때, 그 부모가 수혜자로 낙점될 가능성이 높다.  - P32

나쁜 것,이를테면 고통과 같은 것의 부재는 설사 누구도 그 좋음을 향유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좋음이다. 반면 좋은 것, 이를테면 쾌락과 같은 것의 부재는 그 좋음이 박탈당할 누군가가 있을 경우에만 나쁘다. 이비대칭성의 함의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쁨을 피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우위점 (advantage)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존재하지 않아서 일정한 좋음들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아예존재한 적이 없는 것의 진정한 열위점(disadvantage)이 아니라는 것이다. - P35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태어날 수밖에 없다면,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우리가 나왔던 곳으로 재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젊은이가 그 모든 어리석음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누가 악 아래에서 비틀거리지 않는가? 누가 그 악에서 탈출하는가?
ㅡ소포클레스 - P41

‘살 가치가 있는 삶‘ 이라는 표현은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 - 이것시작할 가12을 현재 삶의 의미(the present-life sense)라고 하자치가 있는 삶 - 이것을 미래 삶의 의미 (the future-life sense)라고 하자-어느 쪽을 의미하는지 애매하다.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은
‘지속할 가치가 없는 삶‘ 처럼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 관하여 내릴 수있는 판단이다.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은 ‘시작할 가치가 없는 삶처럼 잠재적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a potential non-existent be-ing)에 관하여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 사람들이현재 삶 의미를 취해서는 그걸 미래 삶 의미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상당히 다르다. - P47

삶이 시작할 가치가 있는지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 물어야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미래 삶에 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갖는 선호에 호소할 필요도 없다. 내가 다음 장의 2절에서 보여줄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삶의 질에 대한 자기 평가는 신뢰할 수 없다. - P54

사실 나쁜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 어떤 삶도 곤경 (hard-ship)이 없지는 않다. 가난한 삶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삶의 많은 부분을 어떤 장애를 갖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중 일부는 그런 운명을 피할 만큼 운이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삶의 어떤 단계에서는 건강이나빠서 고통을 겪는다. 고통은 흔히 극심하다. 설사 그 고통이 우리의 마지막 날에 겪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긴 기간의 노쇠함을 겪도록 자연의 저주를 받는다.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20 우리는 드물게만 새로 태어난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해악을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모든 고통, 실망, 불안, 슬픔 그리고 죽음에관해서, 어떤 아이에 대해 우리는 이 해악들이 어떤 형태로 발생할지 얼마나 심각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해악 중 일부는 발생하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이 중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자에게는 닥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하는 자들만이 해를 입는다. - P56

 어떤 이가 자신의 삶을 즐긴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존재를 비존재보다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존재하게 되지않았더라면 그 삶을 사는 기쁨을 아쉬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기쁨의 부재는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삶을 즐기지 않을 경우에 존재하게 된 것을 후회 (regret)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이 경우 존재하게 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사람이사는 삶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좋다. 설사 그좋음을 향유했을 누구도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P94

자기 삶이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에 관한 개인의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삶이 그 자체로얼마나 잘되어 가는지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이다. 그래서 자기 평가는 자기 삶의 실제 질 (actual quality)에대한 지표이기보다는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comparative) 질에 대한지표로서 더 쓸모가 있다. 이로써 발생하는 효과 중 하나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부정적 특성은 그들 자신의 복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에서 작용하지 않는(inert)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삶의 질에 매우 유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간과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 P107

쇼펜하우어 견해에 의하면 삶이란 갈구하고 의지하는 끊임없는 상태, 즉 불만족의 끊임없는 상태이다. 자신이 갈구하는 것을 얻는 일은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새욕구를 곧 낳는다. 갈구가 끝이 난다면 그 결과는 지루함, 즉 다른 종류의 불만족(dissatisfaction)일 것이다. 갈구(striving)는 삶의 피할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살기를 멈출 때야 비로소 갈구하기를 멈춘다. - P118

쾌락적 감각은 일부러 구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 감각이 없으면 단조로움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지루함을 포함하여) 괴로움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애써 노력해야만 하며, 그것도 오직 불완전하게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만족은 실제로 삶에 팽배해 있고 팽배할 수밖에 없다. 만족의 순간, 아마도 만족의 기간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들은 갈구하는 불만족을 배경으로 해서만 발생한다. 낙천편향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배경을 흐릿하게 지우도록 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거기 있는 것이다. - P119

많은 질병도 인간행위 탓으로 돌릴수있지만, 우리 종의 일부가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더 의도적으로 야기된 괴로움을 살펴보라. 한권위 있는 저자는 20세기 전에 1억3천3백만 명의 사람들이 대량 학살로 사망했다고 보고한다." 동일한 저자에 따르면 20세기의 첫 88년동안 1억7천만 명의 사람들(그리고 아마도 그 수는 3억6천만 명이 될수도 있다고 한다)이 총을 맞고,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칼에 찔리고, 불에 태워지고, 굶주리게 되고, 동상에 걸리고, 깔려 쭈그러뜨려지고, 노동을 강제당하여 죽었다 산 채로 묻히고, 익사당하고,
[목 매달리고, 폭격당하고,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방법으로 정부는무장하지 않은 무력한 시민과 외국인들에게 죽음을 가하였다." - P136

철학자들은 ... 괴로움을 겪는 종이 증식하도록 선동하기보다는 적은 수의 개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차라리 훨씬 더노력해야 한다.


ㅡ볼테르 <캉디드>에서 마르틴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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