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네델란드계 백인들)

1923년 전체 백인 인구의 10퍼센트를 이루던 남아프리카의 가난한백인들, 그 생활수준이 반투족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백인들은 오늘날이런 가능성을 경고하는 사례이다. 그들의 가난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에 대한 경멸의 결과이며, 흑인 부족의 삶의 방식에 동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장 원시적인 경작 방법이 필요한 소출을 내지 못하면, 또는그들이 지역의 동물들을 말살하면 그들은 땅을 불모로 만들었다. 그들은 흑인 노동자들이 떠나면 어김없이 농장을 포기했고, 과거의 노예
성, 말하자면 약간의 순수함이 있다. 문헌학이나 다른 지적 업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진술의 최고 증인이다." (...) 사태는 영국인의 도착과 함께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1849년에도 여전히 군사 기지로 불리던 (식민지나 플랜테이션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그들의 새 식민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존재다시 말해 원주민들을 다른 동물 종으로 간주하지 않은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다른 태도를 보였으며, 노예제를 폐지하려던 그들의 차후 시도(1834년 이후)와 무엇보다도 부동산에 분명하게 정해진 경계를 설정하려던 그들의 노력―는 정체되어 있던 보어인 사회에 격렬한 반작용을 촉발했다. 이런 반작용이 19세기 내내 동일하게 반복되는 유형을 따른다는 것이 보어인들의 특징이다. 즉 보어농장주들은 후회 없이 집과 농장을 버리고 내륙의 황무지로 이주해 들어갔다. 자기 재산의 제한을 받아들이기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버렸던 것이다.28 이는 보어인들이 가는 곳마다 적응을 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중에 이민해온 어떤사람들보다 아프리카에 잘 적응했고, 적응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에서였지 어떤 제한된 특별 지역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광적인이주 여행은 영국의 행정기관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분명히 그들 스스로 하나의 부족으로 변했으며 한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애착심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암흑 대륙을유랑한 흑인 부족과 똑같이 행동했다유랑의 무리가 우연히 머무르는 곳에서는 항상 편안함을 느꼈고 정착하려는 시도는 마치 죽음처럼느꼈다. - P379

범게르만,
범슬라브나 폴란드 메시아 운동의 선택은 지배를 위한 일종의 의식적인 도구였지만, 보어인이 행한 기독교 곡해는 비참한 ‘백인들‘이 마찬가지로 불행한 ‘흑인들‘에 의해 신성으로 경배되는 소름 끼치는 현실에기인한다.  - P379

여기서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인종 사회의 한가운데로 끌려 들가는어가게 되었고, 거의 자동적으로 보어인에 의해 모든 ‘백인‘을 대표하여 특별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즉 그들은 전체 사업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흑인‘과 ‘백인‘이 사는 정상적인 세계에 개입한 악마 같은원칙의 화신, 즉 다른 ‘인종‘이기 때문이었다. 더 오래되고 출처가 더욱분명한 선민 주장을 하는 유대인에게 보어인의 선민 주장을 확신시키기가 힘들 것이라는 의심에서 이런 증오가 일부 비롯되었던 만큼 증오는더욱더 격렬했다. 기독교는 단순히 그 원칙 자체를 부인하는 반면, 유대교는 직접적인 도전이고 경쟁자처럼 보였다. 나치가 의식적으로 남아프리카에 반유대주의 운동을 일으키기 훨씬 전에 인종 문제는 반유대주의의 형태로 외국인과 보어인 간의 갈등 속에 침투했다. 이 반유대주의는, 남아프리카의 황금과 다이아몬드 경제에서 유대인의 중요성이 세기전환기까지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하다.
- P46

황금 및 다이아몬드 산업이 제국주의적 발전의 단계에 도달하고 부재 주주들이 자국 정부의 정치 보호를 요구하자마자, 유대인들이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의지할 모국의 정부도 없었고 남아프리카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는 너무나 위태로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영향력 감소 이상이었다.  - P388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문명을 파괴하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주요한 정치 무기로 간주한 나치와는 달리, 남아프리카에서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당연한 일이고 기존 질서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P393

제국주의 지배의 주요한 두 가지 정치적 장치 중에서 인종은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고 관료제는 알제리, 이집트와 인도에서 발견되었다. 전자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유럽인들에게 수치였고 공포였던 종족에 대한 의식적인 반작용이었던 반면, 후자는 유럽인들이 절대적으로 자신들보다 열등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생각한 이민족에 대한 통치 수단이었던 행정의 결과였다. 달리 말해 인좋은 인간적인 어떤 것도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무책임성으로 도피하는 것이고, 관료제는 어떤 사람도 동포를 위해 또 어떤 국민도 다른 국민을 위해 떠안을 수 없을 과중한 책임감의 결과였다. - P396

전설은 그를 그가 행하지 않은 것의 주인으로 만들고 그가 원 상태로 돌릴 수 없는 것을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설은 인류의 가장 먼 기억이 아니라 바로 인간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인 것이다. - P397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전설의 번성은 기독교의 탄생과 함께 급격한종말을 맞는다. 아담의 날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기독교적 역사해석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인간 운명에 대해 가장 강하고 포괄적인 전설적 설명을 제공한다. 기독교인들의 영적통일이 국가의 다원성에 무너진 후, 구원에 이르는 길이 모든 사건에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이론이라기보다 개인적 신앙의 불확실한 조항이 되었을 때,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설명이 비로소 나타났다. 19세기는 가장 다양하고 상호 모순되는 이데올로기들의 동시적인 탄생이라는기이한 광경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다른 방법으로는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고 제각기 주장했다. 그러나 전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전설은 보편적 설명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항상 구체적인 사실들에 관심을 가진다. 국가의 성장이건국 전설을 동반하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근대에 들어 시도된독특한 건국 전설은 국가의 몰락이 명백해지고 제국주의가 구식 민족주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이루어졌다. - P397

제국주의 전설의 저자는 러드야드 키플링이었고 그 주제는 대영 제국이었으며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성격이었다(제국주의는 현대 정치의성격을 형성한 유일한 학파이다). 대영 제국의 전설은 영국의 제국주의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반면, 영국의 가장 탁월한 아들들을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강요하거나 현혹했다.  - P398

어떤 사람이 개인적 자질이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한번 팽창이라는 끝없는 과정의 큰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면 그는 곧 과거의 그가 더이상 아니고 과정의 법칙에복종하게 된다. 또한 그는 전체 과정을 계속 작동시키기 위해 자신이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익명의 힘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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