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가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하나의 실체이자 단순한 정치 운동으로 생각한다면, ‘일반 유대인‘,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데도 없는 유대인‘에 대한 추적 열풍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정치사나 경제사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사건의 표면 아래 감추어진 사회적 요소를 역사가가 인식했던 적은 없다. 단지 (사회가 자신의 삶에 대한 변론의 절망적인 고독과 외로움 속으로 추방한 사람들인) 시인이나 소설가의 예리하고 열정적인 힘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이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단순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걸어갔을 진로, 즉 반유대인법령이나 대중의 폭발로 귀결되었을 뿐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았을 그런 진로를 바꾼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소였다. - P213

특별 사면을 받은 지 9년, 무죄 선고를 받은 지2년이 지난 1908년 말 클레망소의 간청으로 에밀 졸라의 시신이 판테온으로 옮겨졌을 때,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파리 법정은 가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드레퓌스의 무죄 결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암시적으로 표현했다.(...)1935년 드레퓌스가죽었을 때, 일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기를 두려워한 반면 좌파 신문은 구태의연한 말로 여전히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고 우익 신문은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에도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치에서 일종의 암호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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