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사는 예지력이라는 끔찍한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신비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나는 내가 겪는 질병에 대해서다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딱 한 번만 제외하고는함부로 말이나 행동을 앞서 나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날인가, 앨프리드에게 살짝 화가 난 상태에서, 그가 머릿속으로고민한 끝에 젠체하며 논평하려던 말을 나도 모르게 먼저 입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앨프리드는 종종 말을 하기 전에 잠깐휴지를 두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음 말을 이어 나가기 전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동안, 내가 조급함과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형이 하려던 말을 마치 기계적으로, 함께 연습이라도 한것처럼 말해 버렸다. 형은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P35
흔히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계약을 할 때 자신의피로써 서명을 한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 계약의 효과가 나중에야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 곁에는 언제나 어두운그림자가 존재하므로 야만성을 이기지 못하고 영혼의 갈증을해소하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악마의 잔을 들이켜고 만다. 현명함을 얻는 데에는 지름길도, 전용 선로도 없다. 그래서 그오랜 세월 내내같은실수를반복했음에도 결국 인간의 영혼은 가시로 가득한 황야를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이며 걸어가야 한다 - P40
우리는 우리 안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쉽사리 녹아 사라질 거라고, 그저 지식의 편협함만이 우리의 관대함과 경외심, 인간적인 경건함 사이에 숨어서 동료들의 감정과 기분에 대한 우리의 엄연한 무관심을 드러나게 하는 요소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최고조에 달할 때 우리의 안일함과 포기또한 강해지는 것 같다. 우리의 승리는 다름 아닌 타인의 상실이다. 따라서 승리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의 차가운 손으로 얻어낸 몫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몸서리치게 된다. - P41
우리 영혼은 인생의 호흡과도 같은 의구심과 희망, 노력을계속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감추어지고 불확실한 것을 반드시 요구하기 마련이다. 만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가 완전히 벌거벗겨져 드러나게 된다면 인류의 관심사는 오늘과 미래 사이에 펼쳐진 시간에 오롯이 집중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아침과 오후의 불확실성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될테고, 마지막으로 남은 투기, 성공, 실망의 가능성을 좇아 온갖 거래소로 죽어라 달려갈 것이다. 스물네 시간 이내에 위기가 닥칠지 닥치지 않을지를 두고 무수한 정치적 예언이 터져나오리라. 여름날이 저물 무렵에야 모든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 그사이에 갖가지 주제나 가설, 논쟁들이 명백해진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해가지면 그 즐거움 또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에 벌들이 꿀로 가득한 꽃으로 모여들듯 예술과 철학, 문학과 과학으로 다들 몰려들게 될 터다. 이제 인간의 충동과 정신 활동은 허망한 미래와 심장 박동, 근육의 과민함에 더는 자신을 맞추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 P56
어느 순간부터 나를 대하는 버사의 태도가 예전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차갑고 냉랭한지 결혼식 날 아침 따스한햇볕 사이로 내 몸을 차갑게 때리던 우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P59
사람들은 이렇게 요약된 한 문장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판단한다. 본인은 온갖 유혹을 물리친 현명하고 덕을 갖춘 정복자라 느끼면서 간결한 한마디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상대방의 경험을 전형적인 몇 마디 말로 떠들어 댄다. 칠 년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이어진차가운 실망, 머리와 가슴의 두근거림, 헛되고 덧없는 싸움, 후회와 절망의 순간들을 차마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데도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너무나 쉽게 요약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단어를 의미가 아닌 기계적인 암기로 체득한다. 의미를 알기 위해선 우리의 생명인 피를 지불해야 하며, 우리신경의 미세한 조직에까지 아로새겨야 한다. - P64
사회로부터 한결 고립되고, 나의 황폐한 영혼이 고뇌에 찬 열정의 폭력적인 발광에서 습관적 통증의 무감각함으로 바뀌어 차차 가라앉을수록기묘한 도시와 모래벌판, 거대한 폐허, 야릇한 빛을 발하는 한밤중의 성좌, 산길과 오후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아늑한 잔디로 가득했던 프라하의 환상보다도 더 선명한 환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런 장면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불확실하고 혹독한 형태 중에서도 유독 어떤 존재가 내게 엄청난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연속되는 고통은 내 마음속의 종교적 믿음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이들에게는 종교적인 믿음도 숭배도 불가능하며, 오직 악마에 대한 추종만이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이모든 것을 뛰어넘어 내 삶이 마지막에 이르러 통증과 질식, 최후의 몸부림을 경험하는 순간의 환영들이 거듭해서 눈앞에나타나기 시작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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