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2020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있다. 이 책은 그 반대 방향에서 쓰였다. 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 P10

물론 재현 주체가 자신의 틀에 맞추어 대상을 규정하는 것은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지배와 피지배는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서구 근대는 이 현상이자본주의와 함께 전 지구적으로 확장된 시대를 뜻한다. 탈식민주의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유럽을 지방화하기》(2000년)에서 "그간 길고 길었던 나의 귀향의 여정은 결국 헤겔에게로 가는 길이었다"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읽고 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진실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부정하고 싶은 절망감이 나를 덮쳤지만, 그대로 몸에 각인되었다. ‘우리 것‘, ‘나‘를 인식하고 찾는과정조차 ‘그들의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탈식민은귀향이 아니라 다른 사회를 만드는 실천이다. ‘전통‘도 ‘현대‘도기존의 것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 P11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년)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 제목이 정말 좋다. 제목만으로 여러 가지 글감이 된다. 비윤리, 무지, 권력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대상(작품)이 아니다. 글로 쓴 대상을 공부하기 전에 글을 쓴 사람을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재현이 ‘누군가가 쓴것‘임을 인식하고, 그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알기 위해 쓴다‘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 - P12

모든 관점은 부분적 시각(partial perspective)일 뿐이다. 이에 더해 ‘왔다갔다(流)‘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앎이고 쾌락임을 받아들일 때 외로움도 덜하고 인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이것이 지식의 본질인 맥락성, 상황이다. 언어가 아무 데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소통 가능하다. "거대 담론 말고 일상성"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 P12

영화의 ‘보이는 밑그림들‘은 관객들의 개인적 사건이 된다.
개별적인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버전일 수밖에 없다(야오이 장르처럼 이미 퀴어 예술가들은 이러한 작업을 해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래서 맥락적이다. 어느 장면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장면이아니라 그 장면 전후의 서사와 나의 이야기가 조우할 때 가장인상적인 장면이 탄생한다. - P14

물론 이 책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는 독자의 가치관과 ‘좋은 글‘에 대한 취향에 달려 있다. 과정이 곧 결과의 일부)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수단이 중요한가 목적이 중요한가라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글쓰기 과정이 공개되는글,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 P15

나를 포함해 인간은 욕심이 많고 어리석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대개 큰 차이가 있다. 자기 존재의 부분성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아는지를 알기 어렵다. 세상 탓을 하자면, ‘내 생각이 객관적‘이라는 식의 자기방어 없이는 이 시대를 살기 힘들다. 윤리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신 승리‘에 익숙한 사람, 그 중간에서 고뇌하는 사람……… 여러 유형의 인생이 좁은 우리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시대다. - P17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때 오가는 흔한 대화, 이를테면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비현실적으로 된 거야" "소설 쓰고 있네" 같은 말은 틀렸다. 영화(재현)가 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실과 재현의 경계는 없다. 현실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디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 (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현실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P23

실험의 조건들을 동일한 환경에서 제어할 때, 그 실험은 과학성(객관성)을획득했다고 말한다. 자연과학의 실험에서도 객관성은 이렇게한정돼 있다. 그런데 매 순간 움직이는 인간의 삶과 현실은 어떻겠는가. 인과론을 무시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원인과결과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사에 원인은 무수하다. - P23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쓰는 것이다. - P24

글은 사람의 결과다 - P26

영화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현실보다 더 현실을 정확하고넓게 드러낸다. 영화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알 수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르는 현실을 알 수 있는 강력한 매체중의 하나다. 그래서 영화 감상이나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삶의중요한 영역이요. 삶의 방도다(물론 영화나 소설 외에도 얼마든지다른 재현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 P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8-09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09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