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가 내년에는 ‘사교계‘에 들어갈 거라고? 도대체 누가 네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을 욱여넣었니? 잘 새겨둬, 이것아, 나는 이제야겨우 살기 시작했어, 알아들어? 그래서 결혼시킬 딸 때문에일찍부터 마음고생할 생각이 전혀 없어. 내가 저것의 귀를잡아당겨 생각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왜 이러고 있나 몰라." - P29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길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면 15일의 무도회는 열릴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겠지. "계집애, 죽기로 작정했으면 다른 날을 고를 수도 있었잖아!" 자기 입으로 이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나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 나도, 나도..." 어쩌면엄마의 그 말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안 좋았다.…. 앙투아네트는 엄마의 눈에서 그토록 차갑고 적의에 찬 여자의 시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P34

그녀는 눈물에 젖은 베개에 머리를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나른하고 허한 일종의 쾌감이 그녀의 고단한 팔다리에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가벼운 손가락을 움직여 잠옷 속으로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게, 경건하게, 사랑을 위해 준비된 아름다운 몸・・・ 그녀는 속삭였다.
"열다섯 살, 오로미오, 줄리엣의 나이…."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면, 세상의 맛이 바뀔 터였다. - P35

앙투아네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막 껍질을 벗긴오렌지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여자‘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대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시해버린다고 의자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하인이 믿게끔, 그녀는 천천히, 차분하게 먹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꺼풀에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이 옷 위에 뚝뚝 떨어져 반짝였다. - P36

그녀는 꼼꼼하게 화장을하기시작했다. 우선 크림을 두손에 개어 두툼하게 바른 다음, 볼에는 붉은색 블러셔를, 눈썹에는 검은색을 칠했다. 그러고는 눈꺼풀을 관자놀이 쪽으로 길게 늘여주는 작고 가벼운 선을 긋고, 분을 바르고……그녀는 아주 천천히 화장을 했다. 가끔 화장을 멈추고 거울을 집어 열정과 불안이 동시에 묻어나는 눈길로, 냉혹하면서도 의뭉스럽고 교활한 눈길로 자신의 모습을 집어삼킬듯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에 난흰 머리카락 한올을 꽉 집었다. 그리고는 온갖 인상을 써가며 그것을 뽑았다. 아! 삶은 온통 어긋나 있었다!  - P54

 그녀는 아홉 시 45분, 열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를 들었다. 열 번의 종소리라니…. 앙투아네트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고는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범죄현장에 이끌리는 미숙한 살인자처럼 살롱을 향해 걸어갔다.  - P58

그녀는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창문으로 다시 달려갔다. 대로를 따라 올라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몇 대는 그들의 집 앞에서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그러면 캉프 부인은 허리를 숙여 시커먼 겨울 거리를 눈으로 삼킬 듯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차들은 멀어져갔고, 엔진 소리는 점점 약해져 어둠 속으로 까무룩 사라졌다.  - P66

‘조르주, 조르주, 누가 초인종을 눌렀잖아요. 못 들었어요?"
"레의 가게에서 얼음을 가져왔습니다."
캉프 부인은 폭발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니까! 사고나 오해가 있었을 거야.
아니면 날짜나 시간을 잘못 알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제 열한 시 십 분, 열한시 십 분이라고!" 그녀가 절망에 빠져 되뇌었다. - P68

‘엄마는 어떻게 이깟 일로 저렇게 울고 있을까? 그럼 사랑은? 죽음은? 엄마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걸 까맣게 잊은걸까?
어른들 역시 금방 지나가버리는 하찮은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앙투아네트는 그들을 두려워했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면, 그들의 헛되고 부조리한 위협 앞에서 벌벌 떨었었다.  - P73

"넌 착한 아이야, 앙투아네트・・・ "
바로 그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사람은 올라갔고, 또 한 사람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들은그렇게 ‘삶의 길 위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앙투아네트가 부드럽게 되뇌었다.
"내 가엾은 엄마.…." - P75

"만약 아주머니가 그를 보살피는 동안 독일군이 들이닥쳤다면?"
"오! 내가 손도 못 대게 했을 거야. 나한테 권총이 있었거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지키는 남자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야. 설사 죽는다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를 보호했을 거야" - P84

얼굴이 상한 그 자그마한 여자는 한때 영웅이었다. 질베르트는 지난 전쟁 동안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여러차례 들었다. 아마 이번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마들렌 아주머니를 가엾게 여겨야 할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질베르트는 생각한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단 나흘 만에전부 써버린 것이다. - P85

질베르트는 그 모든 얼굴 중에서 열정 가득하고 자부심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찾는다. 그런얼굴이야말로 거기에 깃든 영혼에 걸맞을 테니까. 하지만마들렌은 건강하고, 천진난만하며, 질베르트 자신처럼 약간은 되바라져 보이는, 못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젊은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 사람이 아주머니예요?"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툭하면 토라지고, 버럭 화를내고, 생쥐를 무서워할 것 같은 평범한 젊은 여자.
질베르트는 아주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이 가슴을 가득채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 역시 필요하다면 사랑을베풀고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P86

한 남자를 알려면, 그가 식탁에서,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구는지 봐야 한다.  - P89

"그만 해요, 카미유언니, 그만해. 말해봤자언니 마음만아프니까." 이모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냐, 내버려둬. 속이라도 후련해지게 그동안 얼마나숨이 막혔는지..." 엄마가 대답했다.
나는 엄마가 실제로 숨이 막힌다는 듯, 두 손을 목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P123

그래서다시 들어가 새 모자를 사서 나오다가 문턱에서 앙리와 마주쳤어. 그 순간 우린 서로를 바라봤고, 사랑에 빠져들었지…. 오 분만 늦었다면, 그는 한쪽으로, 나는 다른 쪽으로갔을 거고, 우리의 운명은 엇갈렸을 거야. 그랬다면 나도 너희처럼 늙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고 있겠지." - P128

"네 말이 맞아, 마르셀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본능, 나아가욕망의 문제야. 결국,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욕망하는 걸 얻게 돼. 그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야." - P130

블랑슈. 네가 정말 사랑에 빠졌다면 그 남자를 밀쳐내지 않았을 거야. 부끄러움도, 그의 눈에 아름다워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잊었을 거야. 네가 정말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이널 아름답게 만든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야." - P132

‘언니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걸 받아들였어. 네 입술에서 나오는 ‘언니는 그를 사랑했어‘라는 말은 싱겁고 차가워. 하지만 나로서는..….
아! 내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어. 뭐랄까,
그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목소리의 뉘앙스, 발소리, 목에 와 닿는 손의 감각, 격렬한 몸싸움과 키스가 필요했어. 빵이나 물, 소금이 필요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의 말들은 빈약하고 서툴렀으며,
목소리도 고르고 단조로워서 정열적이지 않았다. 그랬다,
엄마에게는 열정의 흔적이 더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경험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가, 예술가, 천재적인 창조자가 망설이며,
틀려가며, 고쳐가며 <월광소나타>를 연주하는 소녀들에게말하듯 그 노처녀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 P138

"아까는 내가 불행했다고 했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야. 난 네가 부러워. 너희의 평화로운 생활이 부러워.
하지만... 난 풍요로웠고, 가득 채워졌었어. 그런데 너희는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지."
그러자 나의 이모 알베르트가 뜨개질감을 떨어뜨리고는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P140

누군가의 욕망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인정하고 연민하기는 어렵다. 연민은 그 욕망의 못남,혹은 찌질함이 내 것이기도 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아주 쉽게 회피의 언어로 욕망을비난할 때, 이렌 네미롭스키는 직설의 언어로 욕망을연민한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가식과 허세로 존재를증명하고자 하는 엄마나 이웃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비아냥이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안쓰러움이기도 하다.
세상도 삶도 믿지 않는 자가 쓴, 그리하여 세상도 삶도이해하게 하는 역설이 네 편의 소설에 담겨 있다. 소설가 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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