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그런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의 아버지도 전쟁 중에 사람 한두명쯤 죽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고 아이를 야단치기도 하는 그 얼굴은 더이상 살인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트럭이 양복점 쇼윈도우를 더럽히듯이 무수한 먼지가 그들의 얼굴에 쌓여 있었다. - P30
‘모두 죽어나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스구로는 토다가 오늘 오후 화난 듯이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회진이 끝난 뒤 공동입원실에서는 한바탕 헛기침이 울려퍼지고 환자들이 박쥐처럼 침대를 기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 P46
더이상 공습경보도 경계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납빛으로 낮게깔린 구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쾅쾅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따금 탁탁 콩이 여물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작년까지만 해도나까스가 불탔느니 야구인 일대가 전소되었느니 하면서 환자나 학생 들이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요즘에는 어디가 불타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누가 죽든 말든 걱정하지도 않았다. 학생들 대부분이 시내 곳곳의 구호소나 공장으로 보내졌다. 연구생인스구로도 이제 곧 단기 현역으로 어디론가 끌려갈 것이다. - P47
사실 조국이 이기든 지든 관심도 없었습니다. 한밤중 눈을 떴을 때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요즘 들어 왠지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둠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그저께 밤보다는 어젯밤이, 어젯밤보다는 오늘밤이 파도의 수런거림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제가전쟁을 느끼는 것은 이때뿐이었습니다. 커다란 북소리 같은 어두운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높아짐에 따라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어디론가 끌려들어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P106
‘우리는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몰려오듯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수술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문밖에 있던 군인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그들의 모습이나 웃음소리는 도망치고 싶은 스구로의 마음을압도하며 빠져나갈 길을 막는 두터운 장벽으로 다가왔다. - P144
"석가모니께서 어느날・・・・・・ 한 제자를 문병하셨습니다. ・・・・・・ 제자는 자신의 똥오줌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 석가모니께서는 정중하게 문병하신 후, 너는 건강할 때친구를 간병한 적이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처럼 홀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네가 평생 다른 사람을 간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 몸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삼대에 걸쳐서도 다 끝나지 않는 마음의 병이 있다." - P150
그는 동료의 눈을 가리키며 수상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눈이 새빨개졌어." 하지만 눈동자가 빨간 사람은 손가락질당한 장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군인들의 눈도 희번덕거리며 보기 흉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정사를 치른 후 눈에 핏발이 서고 기름기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 P163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리듬에맞춰 귓가에 계속 읊조려댔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어.‘ 스구로는그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지우려 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 마음속에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사라졌다. ‘맞아,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주머니가 죽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짓도 하지않았어. 하지만 너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 거기에 있으면서 아무짓도 하지 않은 거야.‘ - P164
검붉은 피로 탁해진 액체에 담긴 이 암갈색 덩어리.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자신이 죽인 인간의 신체 일부를 보고도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이 섬뜩한 마음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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