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잉크가 좋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일도, 계절이 지나는 산중 같은 잉크의 색도 좋았지만 제가 더욱 기뻤던 것은 그것을 제게 준 이가 문방房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건네는 법이니까요.
- P31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나 아직까지도 화해되지 않는 기억들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도 늘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이만들어낸 일이라 생각합니다. 숲이 울창해지는 일도 다시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일도 이러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P39

사는 일이 이상합니다. 마음에 저승 같은 불길이 일고, 그것을 손으로 비벼 끄다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느새 말과행동까지 뜨거워져서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냅니다. 그러다 다시 지금 같은 깊은 밤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마음의 빈 들판을 봅니다. 제게 주어진 밤이라는 시간을, 낮 동안 일어난 불길을 덮는 데에 온전히 쓰는 기분입니다.
- P41

정조는 편지를 통해 ‘입조심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고심환지를 비난하기도 하고 줄곧 한자로 적다가도 생각이 꼬였는지 갑자기 한글로 ‘뒤죽박죽" 이라고 적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웃을 가를 연속해서 쓰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ㅋㅋㅋㅋ‘라는 의성어를 적어놓은 것이다.
- P56

그때 저는 침묵도 부드럽고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침묵의 시간을보내는 일이 참 귀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떤 말이 침묵을 닮았고 또 어떤 말은 침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 P67

먹는 일이 곧 사는 일 같기 때문입니다. 먹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는 날에는 사는 일도 지겹고, 사는 일이 즐거울 때에는 먹는 일에도 흥미가 붙습니다. 이것은 저만 생각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국어사전을 보아도 ‘먹다‘와 살다‘는 이미서로 만나 한 단어가 되어 생계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먹고살다‘
- P73

어떤 이름을 반복해서 발음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점점 그 이름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고, 어쩌면 이렇게 딱맞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하고 감탄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명명마다 유래와 어원은 따로 있지만 음성학적으로만보아도 비는 정말 비라고 불러야 할 것 같고 별은 별이 아니면 달리 부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P92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대단하게 좋은 일이든, 아니면 오늘 들어놓은 것처럼 사소하게 좋은 일이든 말입니다. 이렇듯 좋은 것들과 함께라면 저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 P95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마음이 나를 그 음식 앞으로데려다놓을 것이고, 어딘가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나를 그곳으로 보낼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결국 그 사람과의 만남을 부를 테고요. 그러니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많다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역시저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그리고 믿음이기도 합니다.
- P161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음의 바람과 삶의 현실과 인간의 말은 서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멀지 않음의 힘으로 우리는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오래된 저의 바람입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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