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거기에 백합이 피어 있었던 것도, 하필이면 내가 그것을 꺾어 갖고 왔던 것도, 어쩌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들이 정화된 그 자리에백합 한 송이 피어나, 이제 비로소 그 존재를, 그리고 용도를 내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의 힘을 빌려 내 무수한 전생들, 그리고 이생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들을폐지 해버린 자리, 내 마음의 작은 빈터 안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꽃, 백합꽃을 선물로 놓아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한 송이 백합이 어느 날 넘실대는 환한빛덩어리로 풀려버릴 수 있길 바라면서. - P43
나는 용서한다. 네 몸, 내 몸을, 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을. 나는 용서한다. 모든 형용사들, 부사들을, 모든 비교급들과 최상급들을, 모든 문장들을, 나는 용서한다. 내가 썼던 시들과, 내가 쓸 시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읽었던 혹은 읽을 모든 눈들을. - P51
돈벌레가 벗어놓은 허물을 치우려고 볼펜 끝에 꿰어들고 마당으로 나아가니, 마당 한끝에 분명 어제 내가 다부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다 또 한 거미가 커다랗고 둥근 거미집을 지어놓은 게 보였다. 동그란이슬방울들을 몇 개 단 채 거미집은 햇빛 속에서 제가 전우주인 것마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P61
이제는 낡아 못 쓰는 악기, 그것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각설이 타령을 불러왔던가, 그 환장하게 배고픈 노래들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 P62
이 세계는 영원한 고쳐쓰기의 과정, 구제불능의 패러디이다. 그 세계에서 어떤 이들은 작자가 되길 원하고, 어떤 이들은 독자가 되길 원하지만, 그러나 그 둘은 하나이고, 둘 다 그 주인 없는 테이프의 각본의 원작자가 되길 원한다. 우리는 내면에서 먼저 쓰고 그것을 바깥에서 읽을 뿐이다. 그리고 눈이란 안을 보지 않기 위해, 오직 바깥만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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