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 P12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 P13

나는글쓰기를 통해 그것들을 붙잡아두려고 했다.  - P16

나는 나를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 P17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미술관에 소장된 다른어떤 그림도 내게 주지 못할 힘과 고통을 간직한 하나의 그림을이루고 있었다.  - P17

 "그 남자가 마치 섬세한 신경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나를 애무하더라니까요"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다들 평범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그런 고백이 정신이상의 증거라도 된다는 듯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그 여자를 대하는 것이었다.  - P20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 P21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 P23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 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수 있어서 행복했다.
- P24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25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 P26

친구들로부터 꽃이나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그 사람은 내게 지금껏한 번도 이런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이내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조차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 P29

어쨌든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는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 P30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 P32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나는 상사가 요구하는 시간 외 근무를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 P35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때뿐이었다. 나는 바디아 성당에 다시 갔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반쯤 닳아서 지워진 산타크로체의 프레스코 벽화를 바라보다가 우리의 이야기도 나와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언젠가는 저 빛바랜 그림처럼 되고 말 거라는생각이 들자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 P42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앞에서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남성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토록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 당시 여자들이 처한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 P43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P53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하다. 열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 P59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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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1 1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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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1 1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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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1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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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1 15: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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