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동질한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데, 그러면서 차이의 문제도 논하게 되는 거죠. 이 차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제가 김은주라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김은주라는 사람은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느냐는 거죠. 저는 학생들 앞에서는 선생이기도하고, 동시에 여성이기도 하죠. 그리고 또 다른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노동운동을 한다고 하면 그 안에서 노동자 정체성으로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노동자도 다 똑같은 노동자는 아니라는 거죠. 다른 노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같냐는 거죠.
- P311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이렇게들 말하죠.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의제를 성취하려고 할 때는 다름이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우리가 같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연대가 된다고요. 그게 흔히 말하는 정체성의 정치죠. 그런데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의 끝에 나오는 오드리 로드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잖아요. 차이는 분열을 일으키는 게 아니고, 차이는 정치의 역량, 힘이라고요. 이게이후의 여성들간의 차이, 그리고 여성 자신의 내부의 차이들을페미니즘 정치의 주요한 주제로 삼는 제3물결 페미니즘을 만들어내는 데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 P313

흑인들을 ‘블랙‘이라고 하지만, 다른 색의 피부를 지녔죠.
푸른빛이 도는 블랙도 있고 조금 붉은 블랙도 있고, 아주 어두운피부인 사람도 있고 밝은 피부인 사람도 있죠.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편의에 따라서 이들을 똑같이 같다고 묶어버리는것이다.‘ 같다고 묶여버린다는 건 우리한테 굉장히 모멸감을 줘요. 

예를 들면 서구인이 한국인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태국인과 일본인 중에 일본인과 더 친밀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태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큰 차이를모르겠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너희는 다 똑같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럴 때 모멸감을 느끼잖아요.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어,
그래? 그런가보다‘ 하는 순간 저항감을 느끼고 모멸감을 느끼죠.
이런 걸 보통 ‘동일성의 폭력‘을 겪었다고 해요.
- P314

정체성의 정치에서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들이 생겨요. 정체성의 정치가 무언가를 하나로묶어버리게 되면, 그 주위에 외부가 생기고 그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 - P314

정체성의 정치학은 우리가 같다는 걸계속 확인하는 작업들을 해요. 차이의 정치학은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과제로삼는 거예요. ‘다르다‘라는 건 목소리가 별로 없다는 뜻이에요.

왜?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이 다른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북돋는 게 정치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거예요.
⭐⭐⭐🍭🍭🍭 - P320

페미니즘은 여성이 권력을 찾는 문제이기도 하고 권력을 갖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은 권력자 입장에만 설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페미니즘 운동은 언제나 권력을 갖지 못하는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요.  - P320

권력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생산해내는 것이 차이의 정치의 목표인 거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권좌를 빼앗아오는 것도중요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이 자리가, 이 삶의 자리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 그 자체가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 P321

권력이라고 하면 탈취의 의미, 빼앗고 빼앗기는, 소유의의미로 생각하죠. 그런 권력이라는 건 한정적이에요. 그런데 미셸 푸코를 비롯한 어떤 사람들은 권력은 생산되는 것이라고도 해요. 권력을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낼 수 있는 힘으로 이해하고, 주변화된 이들이 삶의 자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권력의 생산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그럴 때 이 주변화된 사람들이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들이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정치라면요. 이렇게 이해할 때로드 자신이 직면했던 것들을 바꾸는 작업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언어를 갖는 것, 목소리를 갖는 것이겠죠.
- P321

우리를 침묵시키는 건 이런 거죠. ‘너무 내가 나대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나를 쳐다볼텐데, 찍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로드는 침묵을 하든 침묵을 깨든 억압의 구조는 상관 없이 계속 작동할 거라 말해요. 그러니까두려워할 필요 없고, 설치고 떠들어야죠. 침묵하며 살지 말고, 이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꿔나가자는 거죠. 이런생각이 담긴 로드의 글이 바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 P323

페미니스트들한테 참 중요한 게, 이거예요. 언어, 목소리.
페미니스트들은요, 실은 폭력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페미니스트들이 과격하다고 하는데, 말은 과격하죠. 왜 과격할까요? 말이 없던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과격해요.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사학이 없어요. 페미니스트들은 항상 언어와 목소리를 이야기했어요. 왜? 자기 목소리로 말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페미니스트들의 말은 언제나 더듬는 말이었죠.
‘너 조리 있게 말을 해봐. 울지 말고 이런 말들은 폭력이에요. ‘내가 알아듣게 네가 말해야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게 말을 해야 한다는 건 두 번째 문제예요. ‘어버버 하면서 말하는 거 있잖아요.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거요. 사람들이 흔히 ‘비이성적‘이라고 욕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스트의 말하기는 대체로 그래요. 몸으로 말하기. 몸으로 펼쳐내기.
- P325

왜 이 차이를 중요시해요? 이 차이라는 게 역량이고 힘이라는 거죠.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 이 동일한 것들과 다르다는 사실은 큰 역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왜 힘이고 역량인지 그걸설명하는 이론은 많아요. 

우선 많이 이야기하는 입장론standpointtheory을 조금 소개해드릴게요. 샌드라 하딩 Sandra G. Harding 같은 철학자가 대표적이죠. 입장론은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할때가 많고,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이론이에요.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에 따르면 이런 거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들보다 훨씬 넓은 시각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부자인 사람들은 부자들의 세계밖에 못 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세계도 보고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도 보니까,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이고 더 많은 지식에서 참되다는 거죠.
- P329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이런 거죠. 내가차이를 가졌다는 건 나를 두렵게 하는데, 차이를 힘이라고 하는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우선은 내가 차이를 지녔다는 걸인정하고 이해하게 되면, 시야가 넓어져요. 그건 나만이 차이를가진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다채롭게 차이를 지니고 있다.
는 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모두가 동일하다는 주장의 허상을 깨는 거죠.  - P330

그래서 차이는 중요한 역량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차이를이야기하고, 이 차이로 인한 차별과 억압을 증언하고 저항하면서역량을 키워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언어와 목소리를 갖고 침묵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 P331

우리가 플라톤, 셰익스피어가 되어본 적이 있냐고 로드는되묻는 거죠.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가르치냐는 거죠.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되어보지 않은 것들을 다 가르쳐왔잖아요. <데미안》이나 《이솝 우화》 다 읽고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배우면서 ‘왜 우리한테 백인 남성이 쓴 책을 가르쳐?‘ 하고 문제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요..
- P331

 사실상 로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그 범주 안에 실은 차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차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정체성을 분열시키는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닌 후험적 산물임을 드러낸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한, 동일하다고 믿는 정체성이 실은다양한 차이를 차별하고 억압한다면 그 문제를 당연히 말하고 그로부터 저항하는 것이 정의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 - P332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를 만나봤나요? 안 만나봤죠. 그래도 읽잖아요. ‘보편 문학‘이라고 하잖아요. 보편적이라는 건데, 공자가 왜 보편적이죠? 2,500년 전 중국 사람이 하는 말인데, 예수의 말씀이라는 것도 중동 지방에서2,000년 전에 했던 말씀인데 그걸 왜 보편이라고 하나요.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을 보편적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어떤 흑인 여성이 말하는 걸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거죠. 그 안에는 이미 편견이 있는 거예요. 누구를 보편으로 삼고,누구를 보편 인간으로 삼는 거요. 사실 그들도 특수한 것일 수 있는데 왜 보편으로 삼느냐는 거죠.
🍭🍭🍭⭐⭐ - P333

일종의 "맹목성"과도 같은 그 뿌리에는 "차이를 인간의 역동적 힘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있다는 거죠.  - P334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사회일수록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여성들이 말할 권리를 박탈해요.  - P347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해서 확인해온 것처럼, 서구 철학의역사는 차이를 단순한 대립관계로만 이해하죠. ‘차이는 불온한것이다‘ 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차이는 대립에서만 생겨난다는 전제 때문이에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모순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아요. 

인식론적인, 논리적인 차원에서 차이라는 건 이런 거죠. A=not A라는 형태에 기반을 해요. 그러니까차이라는 개념은 이미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서구의 철학적생각들이 전제하고 있는 바라는 거예요. ‘차이라는 건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A와 not A와 같은 대립의 관계 안에서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라는 게 서구의 생각이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른 말로 이분법이라고 하죠 - P375

이 억압의 구조라는 게, 피억압자뿐 아니라 억압자에게도 내면화되어 있어요. 억압의 구조가 억압자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우월하다, 정상이라고 하는 거고, 이 구조가 피억압자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자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로드는 우리가 억압 구조를 볼 때 누가 억압자이냐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피억압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억압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억압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좀 보자는 거예요. - P409

오히려 신체에서 발생하는 많은 징후들, 감정들을누르려고 하거나 무시해야 하는 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 감정을 저 멀리서 관조하고, 감정과 나 사이의 거리를 두는 행위를 통해 내가 나를 잘 연마하고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는 식의 위대한개인 서사를 만들죠.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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