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生)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지않는다.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길도 없고, 경계선도 없다. 광활한 장소가 있으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곳에 있으려니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P14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 때가 자주 있다.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마구 뒤섞인 일들을 모두 내가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한 것도,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닌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또한뒤섞인 일들이 모두 매번 그 본질을 규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에 흡수되어 버리는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자기 과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대부분의경우 나에겐 뚜렷한 주장이 없다. 모든 곳이 개방되어 있고, 더 이상 가로막는 벽도 없으며, 작품은 어디에 숨어야할지, 또는 어디로 끌려나가 읽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의 본질적인 무례함이 더 이상 존중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나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 P15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열여덟 살이던가 열다섯 살 때부터, 내 얼굴은 이미 중년이 되면 알코올때문에 형편없이 이지러질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알코올에는 신(神)이 갖고 있지 않은 기능이 있었다. 자살을 하게하는, 혹은 살인을 하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나는 알코올을 입에 대기 전부터 알코올의 그런 속성을 짐작했다. 알코올 자체는 그 사실을 확인해 준 것뿐이다.  - P15

누가 그것에 대해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날 강을 건넌 일, 그 사건이내 생애에서 가질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그 영상을 찍어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도나는 그 존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신(神)만이알았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 영상은, 물론 달리 어쩔 도리도 없었겠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략되었고 잊혔다. 흐려진 것이 아니라 숫제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부재(不在)를 통해 그 영상은 고유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 어떤 절대를 표현할 수 있는 힘, 요컨대 절대의창조자와도 같은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 P17

나는 버스에서 내려 뱃전으로 갔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어머니는 나에게 메콩 강과 그 지류만큼 아름답고, 유유하고, 야성적인 강은 아마 내 평생 다시 못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대양(大洋)을 향해서 흘러 내려가는 강과 지류들, 대양의 심연 속으로 그 끝이 빨려 들어가는 늪지대들, 멀리서 보기엔 유유한 것 같지만 메콩 강은 급류여서 마치 수평선 끝에서 지구가 기울어진 듯이 쏟아져 내려간다.
- P18

그때 나는 보았을 것이다. 남성용 모자 밑에서, 볼품없이 야윈 얼굴이, 어린 마음에 결점처럼 여겨지던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야윈 얼굴이 자연의 숙명적이고 잔인한 현상을 받아들이는자세를 떨치고 그와는 전혀 반대로 된 것을, 다시 말해,
기질(氣質)이 선택한 어느 달라진 모습이 된 것을, 불현듯,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불현듯, 나는 마치 다른 여자를보듯이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여자는 밖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시선에 자신을 드러내고, 도시와 도시를, 길과 길을 싸돌아다니며 자신을 굴리는,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여자 같았다. 나는 그 모자를 샀고, 그후로 줄곧 쓰고 다녔다. 나는 그 모자, 나를 온통 사로잡은 그것을 내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 P20

나는 그에게 오만한 미소가, 다소 비웃는 듯한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젊은 방랑자의 지친 이미지를 자신에게 부여하고싶었던 모양이다. 그 애는 남에게 헐벗고 야윈 젊은이의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 모습은, 물론 사진을 찍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때 나룻배 위에 있던 소녀의 모습과아주 흡사하다.
- P21

삶에 대한 암담한 절망, 어머니는 날마다 그 절망에 시달리며 지냈다. 절망은 때로는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룻밤 지나면 사라지기도 했다. 나는 그 절망에 완전히 절망해 버린 어머니를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지녔다. 그 절망은 너무나 순수해 인생의 행복조차도, 이따금 그 행복이아무리 강렬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절망을 완전히 해소할수 없었다.  - P22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나는 특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값비싼향유도, 희귀한 보석도, 고가의 장신구도 아니라는 것을알고 있었다. 나는 문제가 다른 것에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것이 여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알았을 뿐이었다.  - P26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을 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28

모든 것이 거기에 있고 아직 아무 일도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내 눈 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내 눈 안에 들어온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 P29

펠트 모자를 쓴 소녀가 강물의 레몬 빛을 온몸으로 받은채,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나룻배의 갑판 위에 홀로 서 있다. 남성용 모자가 그 장면을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이고있다. 그것이 유일한 색깔이다. 안개가 뿌옇게 서린 강 위의 태양, 그 태양의 열기 속에 강기슭은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강은 수평선과 맞닿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강은 유유히 흐른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 - P29

 모든 것이 태평양을향해 간다. 어떤 것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이 강속에 깃든 심오하고 현기증 나는 물살에 실려 갈 뿐이다.
모든 것은 강이 지닌 힘의 표면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 P30

프랑스어 과목 일등, 담임이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 부인의 따님이 프랑스어 과목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한마디도, 전혀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프랑스어 과목에서 일등을 한 것이.
아들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듣기가 싫어서 어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언제 수학에서도 그럴 때가 올까요? 담임의대답, 아직 그렇게는 못 되지만 그럴 때가 오겠지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담임의 대답, 따님이 수학 일등을 원할 때겠지요. 부인 - P31

어머니도, 오빠들도, 추억을 더듬어 보기에도 너무 늦었다. 이제 나는 더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예전에 그들을 사랑했는지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들에게서 떠나 버렸다. 이제내 기억 속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살 냄새도, 그들의 눈빛도, 목소리도, 다만 이따금씩, 제녁이면 피로에 지친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득 떠오를 뿐이다.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웃음소리도, 고함지르는 소리도, 다 끝났다.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렇게 장황하게, 그녀는 술술 풀리는 글이 되었다.
- P38

 나는 어떻게 해서 내가 그처럼 어머니가 금했던 행동을 할 용기를 갖게 되었는지 자문해 본다.
이렇게 담담히, 이렇게 분명한 태도로, 어떻게 나는 ‘이성의 밑바닥 까지 치닫기에 이르렀을까.
- P50

그 광대한 바다가 모였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것 같다.
- P55

그는 미소를 짓는다. 그가 말한다. "서로 사랑을 하든 사랑을 하지 않든, 항상 비참해,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밤이 오면 그런 감정은 사라질 거야."  - P56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 P57

거리에는 살아 있는 물결처럼 혼잡함이 모든 방향으로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중국인 무리는 쫓겨나 방황하는 개들처럼 지저분하고 거지들처럼 맹목적이다. 이제는 풍요로운 그들의 모습 속에서도 나는 당시의 이미지를 문득 다시보곤 한다.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한데 섞여 걷고 있던 그들. 아무런 행복도, 슬픔도, 호기심도 없이 혼잡한무리 속에서 각자 홀로 있는 것 같은 표정들, 어딘가 가고있는 것 같지도 않고, 갈 계획도 없어 보이면서 다만 어슬렁거리기 위해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들, 혼자인 동시에 무리에 끼어 있고, 항상 모여 있으면서 절대로 홀로 떨어져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있는 그들.
- P59

나는 그에게 말한다. 나 역시밖에 있는 회랑에서 생활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밖에서 잔다는 것이 일종의 꿈처럼여겨졌었다고, 갑자기 고통이 느껴진다. 아주 경미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에게 입힌 생생하고 신선한 상처에서느껴지는, 빗나간 심장의 고동이다. 지금 나에게 말하고있는 이 사람, 오늘 오후 내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이사람이 나에게 입힌 상처.  - P61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P69

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제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 P98

하늘에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폭포처럼, 침묵과 부동의 물기둥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는 푸르고, 손에 잡힐 듯했다. 푸른빛, 하늘은 그 반짝이는 빛으로 끊임없이 맥박 치고 있었다. 밤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고, 눈이 닿는 곳까지 강의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을 온통 비추고 있었다.
밤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밤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다. 밤의 소리는 들개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신비를 향해 짖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 만들어 낸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 P98

어머니는 그 사진들을 논리 정연하게, 합리적으로 보여 준다. 이종 사촌들에게 자기 자식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럴 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 그녀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사촌들밖에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들에게 가족사진을 보여 준다. 이런 삶의 모습에서 이 여인에 대해 무엇인가 알 것 같지 않은가? 어떤 일에서도 끝까지 버텨 내는 기질 말이다. 그녀는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 없다. 사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고역에 대해서 마저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맞다. 내가 그녀에게서 깊은 매력을 발견하는 건 그녀의이런 무모한 용기에서였다.
- P114

불멸성은 유한한 것이고, 불멸성도 죽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 이다.  - P124

여인들이 생각하는 여행이란바로 이 선상의 사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에게는, 때로는 몇몇 남자들에게도, 식민지로 가는 여행은 진정한 모험을 해 볼 수 있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러한 여행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더불어 그녀가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 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이었다.
- P128

항구 쪽 하늘은 어두워졌다. 예인선이 배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배를 강의 중간 지점까지 끌어냈다. 그러고는 밧줄을 풀고 항구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배가또 한 번 작별 인사를 했고, 또다시 끔찍한 신음 소리를토해 냈다. 그 소리는 너무나 신비스러우면서도 구슬퍼서사람들을 울렸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로헤어지는 사람들, 구경 왔던 사람들, 또 거기에 특별한 이유 없이 왔던 사람들, 생각나는 이가 없는 사람들까지도슬프게 만들었다.  - P130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 P134

그는 잠깐 뜸을 들인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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