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으면 소심해진다. 아니 소심해서 생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 P9
기사는 공원 입구에차를 세우고 3만 원을 불렀다. 이미 기가 꺾인 나는 뭐라 항변은 못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여기 들어오면 남는 게 없다며 다시 한 번 지역사회를 강조했다. 돌아갈 길을 생각해 그에게 미터기를 켜고 기다려달라 하려던 마음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소심하지만 뒤끝은 있는 나는 3만 원이 결제되고 돌아온 카드를 받고는 있는 힘껏 택시 문을 닫았다. 앙갚음이라도 하듯 먼지를 일으키며 택시는 사라졌다. - P14
일주일 뒤 회사 앞 카페에서 그녀와만났다. 화사한 꽃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작은 얼굴에 보조개를 파며인사하는 그녀의 첫인상은 충분히 의외였다. 스모키 화장에 고스 롤리 복장을 즐기는 소설 속 여주인공을 떠올려왔기에, 저자의 완전히다른 스타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22
애써 호감을 감추긴 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가고 나서였다. 다음 주에 그녀를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옷차림, 그리고 그런 외모와는 상반되게 거침없는 호흡과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이는 그녀의 작품도 좋았다. 그부조화가 신선했고 과연 그녀의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도 궁금해졌다. - P23
그녀는 잔을 비우고 반찬으로 나온 생오이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그 모습이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예뻐 보였다 - P24
"다 내 잘못이죠. 내가 잘못해서 재연이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다나 때문이라고요." 놈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며 차가 덜컹댔다. 덩달아 내 감정도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진짜 내가 신경을 썼으면 이럴 일 없었는데……. 진짜 내가 상병신이지 뭡니까. 다 내 잘못입니다." "제 잘못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자책에도 경쟁심이 있나 보다. "아닙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문제였어요. 내가 더 재연일 힘들게했어요." - P30
민망한 미소와 함께 혀를 쏙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대로 그녀를 보내기가 싫어졌다. 뭐 하나 제대로 결정 못하는 나였지만 그때는 결정하고 자시고도 할거 없이, 방언 터지듯 말이 튀어나왔다. "좋은 날이니까 우리 한잔 더 할까요? 제가 살게요." "아뇨." 그녀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심장이 덜컹 멎었다. "택시비 내실 거잖아요. 술은 제가 살게요." 못 들은 척 우리의 대화를 듣던 택시기사가 허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 P39
"예. 그때 제 유일한 위안은 남자친구를 만나 개 자취방에서 요리해먹고 〈무한도전〉 같이 보며 지내는 거였어요. 둘 다 넉넉지 못해도 음식 사서 해 먹으면 싸거든요. 그리고 한강 같은 데 산책하며 데이트하면 돈도 안 들고….….. 아무튼 그 친구가 취업만 되면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게 하려고 했어요. 번듯한 남자친구가 있으면 더 이상 선을 보라고도 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죠. - P41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집에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부모님께 묻지도따지지도 않았어요. 그러곤 독립을 준비했어요. 스스로 사는 법, 혼자살 공간, 나만의 일, 그런 걸 위해 부모님 말에 복종하며 살았어요. 월급을 모으고, 선보라고 하면 옷을 사 입는다는 핑계로 돈을 받아 모으고, 선은 보지만 계속 거절을 하면서 시간을 벌었어요. 부모님과 함께저녁을 먹기 싫어 일부러 야근을 하고, 아니면 극장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갔어요. 그거 알아요? 비교적 싸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이야구장과 극장이라는 거? (도서관도 있는데ㅋ) - P42
영화를 보며 늦게야 깨달았어요. 말하자면 영화가 제 스승이었던 거죠." "그중에서 특히 좋았던 영화는 뭐가 있어요?" "미스 리틀 선샤인>? 그거 알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거기에 엉망진창 가족이 나와요. 근데 그들은 서로 구제불능이란걸 알기에 한편이 돼요. 우리 집과는 정반대죠. 누군가 못나게 굴면 우리 집에선 추방될 거예요." - P43
먼저 식사를 마친 놈이 카운터로 향했다. 밥값을 계산하려는 건가? 보쌈을 추가로 시킨 건 녀석이니 녀석이 내려는가 보다. 나로서는 생큐다. 근데 아니다. 놈은 카운터에 놓인 녹말이쑤시개를 집어 들고 문옆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그럼 그렇지. 덩치만 큰 좀생이 녀석 같으니라고. - P53
내가 신발을 신으며 시간을 끌자 놈이 계산을 했다. 쌤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놈이 가게에서 나오며 길 건너 모텔의 네온사인을 향해 턱짓을 했다. "밥은 내가 샀으니 모델비는 형씨가 내쇼." 내가 어처구니없어 하자 놈이 덧붙였다. "상행선인지 하행선인지 결판이 안 나는데 어딜 가. 가서 끝장날 때까지 따져보자고." - P55
노래를 따라 부르던 녀석이 휴게소 표지판을 보고 기성을 지른다. 마치 밥그릇을 맞이하는 개처럼 좋아한다. 짐승 같은 놈,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놈을 더 볼 이유도 없다. 조금만 참자. 하지만 그러려면 목줄 정도는 채워야 하겠다. - P65
재연과 함께 떠난 첫 여행지가 남해였다. 그녀는 바다와 산이 겸비된 곳을 사랑했다. 설악산에 오르고 미시령을 넘어 속초에 내려가 1박을 하고, 강화도에 갔다가 마니산에 오르고, 그렇게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섭렵할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고내게 말했었다. 그것이 힌트가 되어서 나는 그녀에게 남해를 여행지로 제안했다. - P72
"아따. 이모, 여전하요?" "나가 바빠 와볼 새가 없었구먼요. 내려오면 볼쎄 들러부렀지." "거시기, 잘 있지요잉?" 앤디의 사투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몰리는 관심과 그에 따른앤디의 오지랖이 심히 부담스러운 나머지 1미터 정도 그에게서 떨어져 걸어가야 했다. - P101
"여그 누가 왔는지 나와봐라." 그러자 식당 안쪽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던 30대 후반의 여자가앤디를 보고는 놀라서 일어났다. 여자는 집 나간 개라도 본 듯 급히슬리퍼를 신고 앤디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갑자기 뭔 일이다요!" (집 나간 개ㅋ) - P102
놈의 등판을 보고 달리며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아까의 사내는앤디의 친형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앤디는 집에 민폐를 끼친 동생인것이고…. 근데 강병균이라고? 앤디가 왜 영어 이름을 쓰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P105
"아따. 인나라, 제주 안 갈 거나?" 숙취에 골골대는 나를 앤디가 깨웠다. 아침 일곱시였다. 비행기 놓친다며 녀석이 반말로 재촉해댔다. 지난밤 말을 트기로 한 게 떠올랐다. 반말로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니 좀 함부로 대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고향을 뜨는 대로 사투리를 자제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 P122
나도 울고 있었다. 휴지로 눈물을 닦아도 곧 또 젖어들었다. 코도나와 풀어야 했다. 반면 그녀는 오래 준비된 변론을 마친 변호사처럼침착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카페 구석에 앉은 우리 둘은 이별을 나누며 감정이 폭발한 연인의 클리셰였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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