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는 한번 더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산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멀어서 갈 수 없는곳이었다. 안개 낀 하늘 속에 서서히 녹아 드는 푸르른 산 어딘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놓고 온 기분이 들었다.
- P95

풋풋한 나무 잎사귀에 맺힌 투명한 초록 물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섬뜩하게 빛났다. 
(상심한채로 주변을 둘러보면 때로 평화롭던 세계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 P97

에드거는 소스라쳤다. 피가 거꾸로 돌면서 몸이 뜨겁게 달아오.
르는 것 같았다. 돌연 이토록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친근한 음성, 안아 주는 따듯한 품, 환한 방,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갈망이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아이를 덮쳤다.
이처럼 어수선한 밤에 주체할 수 없는 어둠이 마음속을 파고든 탓인지 에드거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 P99

그들은 기쁨을 감춘 채 아이를 방으로 데려와 호되게 나무랐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에드거는 혼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족들의 눈에서 기쁨과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난척하는 것도 잠시, 할머니는 금세 눈물을 흘리며 에드거를 끌어안았다. 더는 아무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너무도 훈훈하게 아이를 염려하고 있었다.  - P101

온통 배부른 부르주아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에게 이런 설명할 수 없는 멜랑콜리는 한층 더 고귀한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이 새로운 현상을 관찰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상적 감정의 테두리를 넘어섰다. 여자가 호기심을 느끼는 경우 늘 성적인 요소가 저절로 연루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예술적 감동에 휘말려 찬사를 건넸는데, 통상적 수위를 넘는 정열이 거기 담겨 있어서였는지 피아노앞의 남자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첫 번째 시선에는이미 그녀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동시에불안하면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 P119

남편의 얼굴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놀란 이레네는 그 절제된 진지함과 숨김없는 준엄함을 감탄하며 관찰했다. 하지만 진짜비밀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한 눈은 책을 향해 있어서 관찰할 수가없었다. 그러니 그저 불빛에 흔들리는 남편의 윤곽에서 풍기는 게은총인지, 아니면 저주인지 자문하며 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P127

그의 흰 그림자가 소리 없이 흐릿하게, 유령처럼 문 뒤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이레네는 자신의 관 뚜껑이 닫히는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이 죽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굳은 몸 안에서만 심장이 거칠게 흉벽을 쾅쾅 두들겨댔고 그럴 때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 P137

남편은 지금 그런 위험한 기술을 시험해 보는 걸까? 그가 심리학에 열렬한 관심을 품고 있으며,
그 관심이 법률가로서 알아야 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욱 등골이 오싹했다. 다른 이들이 도박과성욕에 몰두하듯이 남편은 범죄 사건을 조사하고 풀어내고 해명하는 데 몰두했다. 범죄자의 심리를 추적할 때면 그는 속속들이 열기로 꽉 차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져서 밤이면 이미 잊힌 판결 사례들을 뒤적였고 외부 세계를 향해 철조망을 치다시피 했다.  - P138

하지만 예리한 촉각으로도가짜 종이에서는 폭 파인 자국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그의 이마에 그림자가 드리웠고 목소리가 흔들렸습니다. "지금 이게이게 안티오페인가?" 그가 조금 당황해하며 중얼댔습니다. 그래서 제가 즉시 나서며 급히 노인의 손에서 틀에 끼워진 종이를 받아들고는 그 판화에 대해 마침 생각나는 온갖 세부 사항을열광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자 눈먼 노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가시고 긴장이 풀렸습니다. 제가 칭찬을 이어 갈수록 폭삭 늙은 무뚝뚝한 노인은 점점 더 호기롭고 따듯하면서도 우직하고 명랑하며 진솔한 모습으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 P255

60년 세월을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고, 담배도 피지 않고, 여행도 극장도 한번 안 가고, 책 한권 사지 않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이 판화들을 샀으니까. 하지만 내가 세상을 뜨면 네 엄마와 너는 부자가 됐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이 도시 사람 중 제일 부자가 될 테고 드레스덴의 최고 부자들못지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바보짓을 한 걸 고마워하겠지.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판화 한 장도 이 집 밖으로 나가선 안돼. 내가 먼저 실려 나간 후에야 내 소장품도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 P256

오래된 속담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괴테가 한 말일 겁니다. "소장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책 소장가들도^^)
- P259

기쁨이 없는암울한 시대에 다시금 순수한 열광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오로지 예술에 몰입하여 도취할 수 있는 해맑은 정신, 그런 것을 우리 인간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저는 달리는 표현할 길이 없군요 ㅡ경외심을 느끼면서도 여전히부끄러웠고 왜 그런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 P259

 사람들은 대부분 상상력이빈약하다. 어떤 것이 눈앞에서 감동을 주거나, 그들의 감각 속으로집요하게 뾰족한 쐐기를 박아 넣는 경우가 아니라면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을 뻗치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사람들은 곧 지나치게 열을 올리곤 한다. 그런 경우사람들은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과장되게 격렬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습관화된 무관심을 보상하려 든다.
- P263

지독한 긴장 상태에 있던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일이 일어난 순간, 그 인간은 대단히 비극적인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그 어떤 그림이나 언어로도 이런 비극을 그에 상응하는 천둥번개 같은 위력으로 재현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267

 이 보바리 부인의 후예가 촌스러운 뚱보 남편을버리고 세련된 미남 청년을 택한 것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해할 만했다. - P269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남편 품에 안긴 채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을 속이는 대다수 여자에 비하면 자유롭게 본능을 따르는 정열적인 여자가 훨씬 더 정직하다.  - P270

저는 차라리 변호인을 직업으로 택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인간을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을 더 즐깁니다.
- P273

이처럼 대화를 갑자기 끝맺으면서도심한 결례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건 영국 사람뿐이다.  - P275

남편이 죽은 지 2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제가 마흔둘이 되던해였습니다. 가치를 잃었지만 밟아 죽일 수도 없는 시간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저는 3월 말에 몬테카를로로 가게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권태로움 때문에, 구역질처럼 솟구치는 고통스러운내적 공허감 때문에 그리로 간 것입니다. 텅 빈 속은 하다못해 사소한 외적 흥분제라도 양분으로 섭취해야 하니까요. 저 자신의 마음속 감정이 꿈쩍조차 하지 않을수록, 저는 인생의 수레바퀴가 가장 빨리 돌아가고 있는 곳에 강하게 끌리게 되었습니다.  - P281

손을 보면 모든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다릴 때, 무언가를 붙잡을 때, 주춤할 때 손이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움켜쥐는 손은 욕심쟁이의 손이고 느슨한 손은낭비를 일삼는 자의 손이며 차분한 손은 타산적인 사람의 것이고떨리는 손은 절망한 사람의 것이지요. 돈을 잡는 손짓에서도 번갯불처럼 짧은 순간에 수많은 성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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