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키제베터(독일의 철학자)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 논법, 즉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카이사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에게는 절대로 해당될 리 없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카이사르는 인간, 즉 일반적인 인간이니까 삼단 논법이 적용되는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 즉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었고, 항상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 P73

이반 일리치는 정신을 집중해서 통증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죽음이찾아와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 P76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죽음이 이반 일리치를 자꾸만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하도록 하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죽음만을 쳐다보도록, 아무것도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죽음만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하기위해 그러는 것이었다.
- P76

근래 들어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직접 꾸민 응접실에 부쩍 자주 나오고는 했다. 이 응접실은 그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던 곳이다. 그때 다친 옆구리에서 병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는 결국 목숨을 바쳐 응접실을 꾸며 놓은 꼴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 P77

배뇨와 배변 시에도 특수 제작된 용변기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를 사용하는 것은 매번 고통의 연속이었다. 불결함과 창피함과 냄새가, 그리고 용변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너무나 괴롭혔다.
- P80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묵인하고 있는 거짓말,
그는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플 뿐이다. 그러니 잠자코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거라는 그 거짓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하든 병에서 회복될 수 없으며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84

거짓, 거짓, 그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행해지는 이거짓, 무시무시하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한낱 문병이니커튼이니 식사에 나온 철갑상어니 하는 것들로 격하시키는 이런 거짓이 이반 일리치를 무섭도록 고통스럽게 했다.
- P84

그가 보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일 정도로(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응접실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대하듯이)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도 알다시피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 게라심만이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가엾게 여겼다. 그래서이반 일리치는 오로지 게라심과 있을 때에만 마음이 편했다.  - P85

그는 이따금 자신의 다리를 높이 올려 든 게라심이 옆에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이반 일리치나리, 저야 아무 때나 자면 되니까요)라고 말해 주는 것이정말 좋았다. 아니면 불쑥 친근한 어투로 (안 아프셨더라도 뭐 이 정도 못해드리겠어요?)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도좋았다. 

오직 게라심만이 그에게 그 어떤 거짓말도 하지않았다. 모든 점에서 볼 때, 게라심 하나만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다만 점차 쇠잔해 가는 나약한 주인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 P85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위해 고생 좀 하는 것이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으며, 그또한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 P86

거짓말 외에, 아니 거짓말 때문에,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기간 고통스럽게 병마와 씨름하면서 이반 일리치는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소망했다. 

아이를 달래며 보살피듯 다독여 주고 입을 맞춰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 주기를 바랐다. 수염이 하얗게 세어 가는 나이의 권위 있는 판사에게 그렇게 해줄 수 없다는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누군가가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게라심과의 관계에는 그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고, 그래서 그는 게라심과 있을 때면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 P86

이반 일리치가 느끼기에 의사는 (잘 지내시죠?)라고 말하려 하다가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에 (밤새 안녕하셨나요?)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반 일리치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라는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의사는 그의 표정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 - P92

고요 속에서 그는 어떤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언어로 된 목소리가 아닌 영혼의 소리,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생각의 흐름에 귀를기울였다.(너한테 필요한 게 무엇이냐?) 그가 맨 처음 들은 가장확실하고 분명한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필요한 게 뭐냐고? 무엇이 필요하지?)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무엇이냐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것. 사는 것.)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통증조차 못느낄 정도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걸 말하는 거지?) 영혼의목소리가 물었다.
(그래, 사는 것. 예전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게.)
(예전엔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어?) 목소리가물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자신의 즐거웠던 삶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순간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이상하게도, 즐거웠던 삶에서의 좋았던 순간들이 이제는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제외한 모든것이 다 그랬다. 그때, 어린 시절에는 진짜로 기쁜 무언가가 있었다.  - P103

그러나 그런 기쁨을 누리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회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회상하는 것처럼 느껴겼다.
- P104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죽는 것만 남았어!
💫💫💫💫💫 - P105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 지내는 요즘 이반 일리치는 고독과 함께 살았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대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고독이었고, 지인들과 가족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느끼는 고독이었다. 바닷속 저 깊은 곳에서도, 땅 밑 저 아래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절대 고독이었다.  - P108

전에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여겼던 생각, 즉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으신 분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저항하고 싶어 했던 한때의 희미한 충동, 그러나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떨쳐내 버리곤 했던 그 충동만이 진짜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업무, 그가 삶을 살아온 방식, 가족, 사회와 직장에서의 이해관계 같은 것들이 모두 잘못된것일지도 몰랐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모든 것들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돌연 자신이 변호하려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허접하기 그지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호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113

그는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 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 - P114

죽어 가던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두 팔을 내젓고 있었다. 그의 손이 소년의 머리에 부딪혔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 P119

<용서해 줘>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가게 해줘>라고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쳐 말할 힘조차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겠지.
💫💫💫💫💫 - P120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증은?) 하고 그는자신에게 물었다. (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간 거야?)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에 있었군. 그래, 뭐, 거기 있으라고 해.)(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그는 그동안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 P120

주인공의 모델이 된 인물의 동생으로,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인메치니꼬프는 (죽음의 공포를 이보다 잘 묘사한 작품은 없을것)이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이 소설을 언급하고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이키루>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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