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풀이 선생님은 정신이 나간 채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 소란 속에서 인식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꽉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콧물을 한가득 매단 채 울고 있는 코풀이 선생님이 서 있었다.
- P150

인식 자신도 같은 대학 유학생 그룹에 참가해서 양부산을 중심으로 한 사람의 의대생으로서 산민 위생을 조사하거나 간이 치료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면 한 줌의 흙, 한 다발의 풀조차 새롭게 느껴져 가슴 설레는 그였다. 그렇지만 타고나기를 소박한, 감수성 넘치는 젊은 인식에게는 조사라는 역할보다 오히려 쫓겨 가는 화전민과 함께 울겠다는, 어쩌면 다소 감상적인 생각이 너무 앞섰는지도 모른다.  - P157

어떤 면에서는이처럼 가장 황폐한 고향의 품에 돌아와, 뭔가 알 수 없는 자연의위용에 약한 마음을 질타당하고 채찍질당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경성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 합승버스로 준령과 협곡을 넘어 이 오지까지 오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고동쳤는지를기억하고 있다. 불타버린 험산 하늘가에서 화전민들의 시커먼 오두막집을 바라보던 때는 자신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그곳으로 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 무슨 비참한 고향의 모습인가! 오히려 그것을 아는 것이 두려운 생각조차 들었다. 우리의 생활을 우선 알아야 한다고 외쳐온 그가 아니었던가.
- P157

그저 의욕을 잃고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는 화전민 사이로 들어가면 마음만이라도 가벼워질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작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그제서야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이 감상적에고이즘인걸까, 인식은 눈시울을 적시며 생각했다.
- P158

"히히히." 하고 아이는 백치처럼 웃었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눈이 희번덕거렸다.
"엄마가 아버지를 때리고 있다니요."
"그래? 왜서 그런 거이?"
모두들 다가가 물었다.
"몰라, 히히히. 들어가 보면 알 거 아니우, 들어오우, 들어와."
- P159

돈이라도 냉겨 가지고 오면 어데 덧나는지.
맨날 날으 꼴딱 새고 기 들어오는 주제에 술이 당키나 하우! 머어, 잔체(잔치)라고? 당장 낼 떼꺼리 (끼니)도 없는 주제에 코댕가리가치 몬느므 잔체요! 내 하에 치매 우트 할꺼나고? 우트 할끄나니까? 비러머글 군청놈들, 즈 집 오슨(옷은) 애끼노미(아끼면서) 나므 치매(남의 치마)는 말이 되우야… 내거 부애가 치밀어 살수가엄싸요."
- P161

먼 산 쪽에 숨어 있던 달이 이윽고 얼굴을 내밀자 황금색으로 빛나는 달빛이 흐르는 물속에 잠겨 들어 수면을 건너는 산들바람에 몸을 떨었다.
- P162

산속으로, 산속으로 모여들 뿐인 화전민들은 곧잘 바람 없는대낮에 경작지를 얻기 위해 산에 불을 지른다. 하지만 돌연히 바람이 불어 산불이 계속되면 또 이렇게 관청에까지 알려지게 되는것이다. 이곳 산민들에게는 그런 산불이 무엇보다 아름다운, 저주받은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자알도 탄다니!"
"지대루 큰 불이라니! 저 정도믄 며칠 밤낮을 갈지 알 수 없우야."
저마다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P169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결국 아이처럼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P172

화전민은 산에 불을 놓아 그 재를 비료로 삼아 산허리나 산 정상을 경작하고 감자나 콩,
귀리, 도토리 등을 먹으며 연명한다. 하지만 한 곳에 2, 3년 거주하면 땅이 황폐해지기 때문에 다시 그 오두막을 버리고 보다 깊은 산 속 처녀지를 향해 불을 붙이면서 들어간다. 방화는 쫓겨 들어가는 그들이 이 세상에 퍼붓는 일종의 저주일까? - P175

이곳에는 수고하고 씨뿌리려 하나 땅이 없고, 거두려 하나 거둘 것이 없고, 먹으려 하나먹을 것이 없는, 공중을 나는 새보다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마태복음 6장 30절 구절 중 일부)‘보다도 못한 백성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은 무도한 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고그 생활조차 끊임없이 위협 당한다.
- P182

마당 끝 한구석 촉촉하게 젖은 덤불 속에 흰 백합이 몇 송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슬 맺힌 꽃잎은 달빛에 흔들리며 바람이 부는 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흰 백합들은 서로가 어떤 슬픔을 이야기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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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83

쇼와 12년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해 - 옮긴이) 이후 4년간 약 109회에 걸쳐조선 전 지역에서 행해졌다는 이 무시무시한 살인이 어째서 지금까지 당국의 손에 발본색원되지 못했을까를 생각하며, 그는 암울해졌다. 하지만 읽어내려가는 동안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던까닭은 무엇보다 이 마교의 살인현장 중 하나로 거론된 곳이 일찍이 그가 방문했던 그 폐사 부근 산골짜기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록을 덮고 눈을 감으니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옛 생각이 있었다.
- P186

<노마만리>는 김사량이 타이항산 지구의 항일근거지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탈출기로, 해방직후에 평양에서 발표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 도입부를 소개한다. 1955년 국립출판사에서 발간된 『김사량 선집 을 저본으로 하며 『金史良全集W(河出書房, 1973)을 참고하였다. 기존의 『노마만리』는 대부분 저본을 그대로 살렸다면, 이 책에 실린 『노마만리』는 현재의 한국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옮긴 글임을 밝혀둔다. 단 이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원문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 P190

샹하이라는 도시가 도시요 또 백귀암행(百鬼暗行)의 시절이니만치 그 청년이 일경의 끄나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 바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나대로의 조그만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독립이 조선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조선민족의 해방이 그 국토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만큼 왕성한해외의 혁명역량에 호응할 역량이 국내에도 이룩되어야 한다는것이었다. 

그러자면 국내에서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망명하는 이는 별개 문제로 하고 나와 같이 국내에 발을 디디고 살 수 있는사람이 일부러 망명한다는 것은 하나의 도피요 안일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제 1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곳이면또 모르려니와 몇천 리 산 넘고 물 건너 대후방에 위치한 충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다 더 비겁한 도피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P200

하루는 중학 시절에 스트라이크를 팔아먹던 동창생 (김사량은 평양고보 재학 중에 항일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재적되었다 - 옮긴이)이 서울로부터 독립운동을 하자고 내려왔다. 알고보니 경무국의 끄나풀이었다. 또 한번은 명색모를 사내가 공산주의인가를 하자고 했고 이자는 헌병대의 앞잡이였다. 이런 형편이니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게 되었다. 출국의 결심이여기서 다시 생기게 된 것이다.
- P202

사실 1945년이란 시기의 조선은 참으로 형형색색의 인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기는 모르되 이 베이징 천지에도 얼핏 보기에는 범놀음을 하는 범가죽을 쓴 개들이 많을 것이다.
🐯🐯🐯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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