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깨끗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깨끗했던 적이 없었다. 에밀리는 이 집에, 자기 자신에게, 나오지 않는 라디오에,
타이어가 구멍 난 자기 자전거에 애정을 잃었다. 두 방문객은여름 파리를 여태 쓸지 않았다는 것, 비질을 한 곳이 없다는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 P23

두려움이에밀리가 말한 사랑을 고갈시켜 껍데기만 남았지만, 방문객앞에서 그랬듯 에밀리는 사랑의 잔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슬퍼할 수 없었고, 애도할 수 없었다. 너무 적은 것만이 남았고,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차를 타고 떠난 그들은 이 사실을알까? 다른 이들이 물으면 이 사실을 설명해줄까?
- P27

"레깃 짓이야." 매클루스가 말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다.
네이피어만이 함께 레깃을 의심했다. 올리비에를 제외한 나머지는 당황했다. 새들은 목이 부러졌고 그중 한 마리는 머리가뜯겨 있었다. 흙 위에 누워 있는 새들의 깃털은 이미 축 늘어졌고 구슬 같던 눈은 흐릿해졌다. "잔인한 놈들." 뉴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항의나 감정의 기미는 없었다. 올리비에는 그 소녀의 짓임을 알았다.
- P29

올리비에는 교실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면서 부당한 보복을 예상했으나 자신이 스스로의추측을 발설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러지 않는 것은, 자기생각을 비밀로 감추는 것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 P34

올리비에를 제외한 모두가 그 생각을 했다. 다인스는 이 세계의 질서 바깥에 있었다. 이들은 다인스를 때리거나 괴롭힐수 없었고, 그에게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잡역부가 갈까마귀를 키우는 곳을 알긴 했지만 혐의를 물으면 자신이 그동안 침묵해온 것들을 폭로할 가능성이 높았기때문이다. 다인스는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 P37

올리비에가 그곳에 있으면 마치 더 잘 만들어진 예시처럼 보였고, 나머지는 부주의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학생들은 청소년의 느낌이 두드러졌다. 재킷 소매가너무 짧았고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쳤으며, 목소리가 걸걸하고 막 자라기 시작한 까칠한 수염 아래 피부가 울긋불긋했다그러나 올리비에가 이 성년의 서곡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들이 남겨진 데 대한 유감 없이 받아들인 그 깡마른 꼴사나움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38

원래는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사생활에 침입하는 데 능했고, 스스로도 자부심이있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두 번, 혹은 세 번이나 불시에 시선을 돌려받고 감시하던 눈을 즉시 내리깔아야 했다. 이 식당가정부의 이름은 벨라였다. 하지만 식당과 바깥에서 벨라는‘그 소녀‘로 통했다.
- P40

책이 꼭 필요했던 여자는 가게에서 나오면서, 차에 타면서 그라일리스의 눈에 자주 띄었다. 그가 여태까지 알았던 종류의 여성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키가 크고 나름의 아름다움이있었다. 침착한 태도와 옷차림에서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드러났고, 해버티 씨가 은퇴한 것을 모르고 멍한 얼굴로 그가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할 때는 더욱더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그라일리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 미소를 지었고,
그는 전에 그녀의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다음번에는 대화가더 길어졌고, 그다음 번에는 더욱 쉬워졌다. 

그녀에게 어떤 소설가를 추천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프루스트와 맬컴 라우리를, 포스터와 매덕스 포드를, 개스켈 부인과 월키 콜린스를 소개해주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더블린 사람들》을 한 권 더 들여놓았는데, 기존에 있던 책은 비를 맞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브라이턴 록》과 《밤은 부드러워로 그녀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녀는 혼자서 엘리자베스 보웬을 찾아냈다.
점심시간이면 그는 깔끔한 그녀의 거실에서 와인을 따랐다.
그들은 자신이 경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신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속의 경솔한 사람들에 대해, 팰리스 플롭하우스에 대해, 취한 광장과 돌코테 물방앗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P116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지 않았으나, 본인들이 모르는 사이 그들의우정으로 전과 달라진 방 안에는 그들의 삶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고, 후회나 과거에 있었을지 모를 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단어를 통제하는 능력을 잃지않았다. 그녀는 지나간 과거를, 그는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을배신하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내오면 그는 내리는 비나 차가운 봄의 햇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고, 다시 와일드펠 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넓은 현관을 배경으로 계단 위에서 있었고, 그의 백미러에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곧 버드나무로 바뀌었다.
- P117

이 모든 것은 가식, 일종의 기만과 관련이 있었다. ‘유감이에요.‘ 로즈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박스트리 카페에서 내뱉은 그토록 많은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로즈는 부버리 씨의 신뢰를 함께 나누고 싶었지만 부버리 씨가 신뢰를보이기도 전에 이미 그를 배신했다.
- P196

무용 선생이 연주한 음악은 그때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연주한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음악은 쏜살같이 달려나가다 부드러워졌고, 잔잔했고, 느렸다. 진홍색 벽지와 초상화 속 인물들의 시선 위에서 음악이 춤을 추었다. 음악은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 위에, 꽃병과 장식품 위에 머물렀다. 그러다 점점 위로 떠올라 천장의 새하얀 꽃잎에 닿았다. 브리지드가 두 눈을 감았고, 무용 선생의 음악이어둠 속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음악의 선율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달라졌다. 개똥지빠귀의 노랫소리가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과, 브리지드가 스케나킬라 언덕을 넘을 때 옆에서 세차게 밀려들다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음악이 멈췄을 때 침묵은 전과 같지 않았다. 마치 음악이 침묵을바꿔놓은 듯했다.
- P262

2월의 그날 밤, 언덕의 자갈길에는 서리가 끼어 있었고 하늘에선 별들이 환하게 타올랐다. 브리지드는 그 별들이 아까 들은 음악을, 그 아름다움을, 자신이 느낀 감정을 더욱 찬양하는것 같았다. 노력해보았지만 그 선율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쏜살같음과 느림과 잔잔함, 지금 곁에 흐르는 개울이 만들어내는음악은 거실에서 눈을 감았을 때 들렸던 것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케나킬라 언덕을 넘는 동안 브리지드는 그때 있었던 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브리지드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부엌 뒷방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 P264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말투에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야 할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사랑의 까다로운 특성을 잘 알았다.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잘못된 대상을 향했다.
- P269

"비밀의 그림자 속에
겨울 꽃이 흩어져 있었고,
기만이 조용한 사랑을 기다렸다."

트레버는 이 소설들을 통해서 누구나 마음속 깊이 자신만의 비밀을간직하며 살아가고, 그 비밀이 우리를 끝내 고독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놀랍게도 트레버 덕분에.
그 고독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_ 백수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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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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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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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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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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