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가레가 철학자가 되기 이전 저서들은 정신분석학과언어에 관한 것이다. 그중 『치매환자의 언어(Le Langagedes déments)』(1973)는 치매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언어적기능의 주된 장애가 대화 상대자에게 적절히 반응하여 타자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반응을 낳는 주체적 발화 능력의상실임을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이리가레는 남성 중심적인 상징 질서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바로 이와 유사하며, 훗날 자신의 주요 개념이 될 ‘성차‘가 언어 안에 존재함을예기치 못하게 발견하게 된다. - P2
페미니스트 철학자로서 그녀의 학문적 삶이 크게 변화한 것은 1974년 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반사경, 여성으로서의 타자에 대하여(Speculum. De lautre femme)』(이하 『반사경)를 제출하면서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곤란을겪은 뒤 출간한 『반사경』은 기존 프랑스 학계에는 꽤나 당황스러운 텍스트였음이 분명하다. 이 저작은 서양의 사상적 아버지들인 수많은 남성 철학자들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남성 이론가들의 목록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도 포함되어 있었다(라캉을 위한 장을 별도로 마련하거나 직접 언급하지는않았지만, 라캉의 방식으로 해석된 프로이트를 독해하고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이 성차에무지하고 무관심한 남근중심주의 담론이라고 날카롭게비판한다. - P3
이 일련의 사건은 이리가레가 특히 초기 저서에서 보여주듯이 상징 질서에서, 무엇보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담론을 자처하는 철학에서 여성의 관점과 목소리가 어떻게 배제되고 삭제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 P3
『반사경』과 『하나가 아닌 이 성(Ce sexe qui n‘en est pasun)』(1977)으로 대표되는 첫 단계는 비판의 시기다. 여기서는 서구의 자기중심적이고 단성적인 남성 주체가 세계를 구축하고 이해하며 해석해 온 방식을 분석하고 타자인여성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한다. 특히 『반사경』은 철학의주체 개념이 다른 모든 타자들을 남성적 주체와의 관계로환원해 버린다는 것을 폭로한다. - P4
그에 비해 이리가레의 글은 난해하다. 정신분석학, 철학,언어학의 개념들과 사상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기때문만은 아니다. 이리가레에게는 글쓰기 양식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철학적 전략이자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촘촘한 논리적 건축물을 세우는 대신 끝없는 의문문과비약이 있고, 주어와 술어가 문장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대신 시적 표현이 난무한다.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분쇄하여 ‘그의 말과 그녀의 말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어디까지가 남성 주체의 언어이고 어디부터가남성의 타자로서 여성의 메아리인지, 혹은 이리가레 자신의 주장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 전략을 엘리트주의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이리가레의 글쓰기 스타일은 중성적인 인간주체를 자처하는 남성 주체성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단일한 주체의 말에 적극적인반대 주장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질문들을 쏟아 냄으로써, 이리가레는 남성 주체의 단단한 동일성에 금이 가게 하여대화가 가능한 간극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 P9
장르는 글의 맥락에 따라 어떤 때는 젠더로 번역될 수 있지만 대체로 문법적 성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환원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성적 차이를 가진 두 성을 지시할때 사용된다. 즉 사회문화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의 젠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새롭고 낯선 용어와 언어유희는 이리가레의 글을 면밀히 살핀다면오히려 그녀의 문제의식과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역할을 할 수 있다. - P11
존재론적인 차이로서 성차 개념은 섹스, 젠더 이분법에대한 반성을 고무했다. 비판적 무기에서 어느새 불가침한강령처럼 되어 버린 페미니스트들의 반(反) 본질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성들 사이의 차이는 섹스와 젠더라는 이원화된 지대를 넘어 생물학, 자연, 욕망, 무의식, 언어와 상징 질서가 복잡하게 또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생성 중인 것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정치학과 인식론에 집중되어 있던 페미니스트 이론은다양한 층위와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할 가능성과 그 실제 사례를 갖게 되었다. - P12
여성 철학자로서, 또한 페미니스트로서는 드물게 별도의 학회(이리가레서클(The Irigaray Circle)]가 만들어졌다. 는 데서 우리는 이리가레의 영향을 더욱더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철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 들뢰즈주의자처럼 한철학자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가 형성되고 새로운 쟁점과개념들을 발굴하여 현대의 문제들과 연결 짓기 위해 고전을 반복하여 연구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고 태생적으로 권위주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인지 그러한 작업이 드물다. 반면 이리가레의 철학에 관한논문과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학회가 설립됐다는 것은이리가레 철학의 특수한 위상을 짐작케 한다. 국내의 경우 이리가레에 대한 대중적 수용은 과거에 비해 감소했지만, 전문 연구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성철학 혹은 페미니스트 철학이라는 분야가 철학연구자에게도 그 이름조차 낯선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극소수이긴 하나 전공자도 조금씩 불고 있고, 더불어 여러분야에서 이리가레에 대한 연구도 늘고 있다. - P13
반사경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의 동일성을보장하기 위한 거울 역할을 한다. 남성은 여성을결핍된 존재로 설명함으로써 남성 자신의동일성과 우월함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남성 중심적 담론에서 여성이어떻게 타자가 되고 배제되는지 폭로한다. 반사경은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 담론을 비춰보여 주는 거울이자 여성의 입장에서 세계를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며, 나아가 여성의 거울역할을 동요시키고 여성 자신을 재현하기 위한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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