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신의 전통 엘뵈프‘가 당하는 모욕과 함께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그녀의 가게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축적돼온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가게의 파국은 곧 그녀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며, ‘전통 엘뵈프‘가 문을 닫게 되는 날에는 그녀도 그와 함께 생을 마치게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P49

다시금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보뒤는 밀랍을 입힌 식탁보위에서 손가락 끝으로 퇴각의 곡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또다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에 나른한 피로감과 더불어 후회마저 느끼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짓누르는 가운데 그들 모두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자신들의 씁쓸한 인생 역정을 되돌아보았다.  - P49

무레는 온갖 종류의 무모함과 경솔함, 부주의로 인한 실수 그리고 여자들과의 우려할 만한 스캔들로 얼룩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부르동클은 열정적인 프로방스 출신의 동료처럼 반짝이는 천재성과 대담함, 사람들을 압도하는 매력을 갖추지 못했다.  - P59

매사에 분명하고논리적이며 냉철한, 따라서 추락할 위험도 없는 그였지만 성공은 여자와 같은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파리는용감한 자에게만 키스를 허락한다는 것을.
- P62

드니즈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생각이 너무나 엉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리스도의 변용(變容)처럼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 보였다. 발그스레한얼굴에, 다소 커 보이는 입가에 띤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활짝 피어나게 했다. 회색빛 눈동자는 부드럽게 불타오르는 듯했고,
양쪽 뺨에는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패었다. 빛이 바랜 것 같은머리조차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함과 용기를 동반한 경쾌함 속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듯 보였다.
- P98

그는 신화로 둘러싸인, 무시무시한 기계의 주인이었다. 아침부터 강철 이빨로 그녀를 물고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조종자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 뒤로, 잘 다듬어진 수염에서, 오래된 황금을 떠올리게 하는 눈 속에서 죽은 여인이 보이는 것 같았다. 피로 백화점의 돌들을 봉인한 예의 그 에두앵 부인이었다.  - P99

이제, 여인네들은 모두 마르티부인이 산 것을 보고자 하는 호기심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유혹에 약하고 낭비벽이 심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숙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남자의 구애에도절대 흔들림이 없는 그녀였지만, 조그만 천 조각 앞에서는 즉각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그 유혹에 굴복하곤 했다. 평범한사무원의 딸인 그녀는 이제는 보나파르트 리세에서 제5학년과정을 가르치고 있는 남편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녀의남편은 점점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1년에 6천 프랑의 수입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출장 교습과 같은가윗벌이를 끊임없이 찾아다녀야만 했다.  - P109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레의 우아한 몸짓 뒤에는 여성의 살을 파운드로 떼어 팔고자 하는 유대인 상인의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여성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로 하여금 여성을 위한 향을 피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숭배 의식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나 깨나 오직 여성만을 생각했으며, 끊임없이 더 효과적이고 강렬한 유혹의 방식을 생각해내기에 바빴다. - P134

"그러다 언젠가는 여자들한테 크게 당할 수도 있네."
하지만 무레는 오만하고 경멸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모든 여자들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녀들은 그에게 속했지만, 그는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여자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부와 쾌락을 모두 얻고 나면, 그녀들에게서 아직 무언가를 얻어낼 게 있는 이들을 위해 가차 없이그녀들을 버릴 것이었다. 이 모든 건 투기꾼 기질을 지닌 남부출신 남자의 치밀하게 계산된 자신만만한 행보였다.
- P134

바로 그 순간, 고개를 든 마르티 부인은 바로 앞에서 잔뜩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운명에 체념한 가난한 남자의 고뇌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토록 힘겹게 벌어들인자신의 급여가 얼음이 녹듯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레이스 한 조각은 그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그로 인해 힘겨운 수업과 출장 교습을 하며 보낸 나날들이 모두 탕진되고 먹혀버렸던 것이다. 그는 쉴 새 없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도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고통과 지옥 같은 궁색한 삶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 P144

석양이 느끼게 해주는 나른한 관능적 분위기와 여인들의 어깨에서 풍겨 나오는 달아오른 체취 속에서도, 환히 웃어 보이는 얼굴 뒤로 여전히 흔들림없이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았다. 그는 여자였다. 여인네들은자신들의 깊숙한 내밀함을 간파해내는 섬세한 감각을 지닌 그에게 온통 까발려지고 지배당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매료된 채 기꺼이 자신들을 내맡겼다. 반면 무레는 여자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확신한 순간부터 거친 태도로 그녀들 위에 군림하면서 천들을 지배하는 전제군주처럼 굴었다.
"오! 무슈 무레! 무슈 무레!"
- P146

터키,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가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궁전을 모두 비워내고, 모스크와 바자르를 약탈이라도 해온 듯했다. 낡은 옛날 카펫들속에는 황갈색을 띤 금빛이 주된 색조를 이루고 있었고, 퇴색한 빛깔들은 불 꺼진 화덕의 잔해처럼 어두운 열기를 간직하고있었다. 나이 든 대가의 그림 속에서처럼 그윽하면서도 섬세한느낌을 전해주는 색조들이었다. 태양과 해충의 나라에서 온 오래된 양털이 간직한 강렬한 내음이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야성적인 예술이 과시하는 화려함 뒤로 동양의 꿈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 P153

그들은 한 단계를 더 올라가기 위해 바로 위에 있는 동료를 밀어내고, 누구라도 장애가 된다면 동료를 먹어치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욕망의 대립과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행위는, 거대한 기계가 순조롭게 작동하면서 판매를 촉진시키고, 파리 전체를 놀라게 하는 성공의 불꽃을 지피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위탱의 뒤에는 파비에가 있고, 파비에의 뒤로는 또 다른 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괴물 같은 기계가 거대한 아가리로 요란하게 씹어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비노는 이미 끝장난 목숨이었다. 모두들 벌써부터 앞다투어 그의 뼛조각을 하나씩 차지했다.  - P273

무레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야심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이 이룩한 백화점의 왕국에서 여왕으로군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을 위한 신전을 지어 바친 다음,
그곳에서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정중하고 세심한 배려로 여성을 취하게한 다음, 그녀의 욕구를 부추겨 달아오른 욕망을 충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P393

그들이 내세우는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광고였다.
무레는 카탈로그와 신문 광고, 포스터 등에만 연간 30만 프랑을 쏟아부었다. 여름 신제품의 판매를 위해 20만 부에 이르는카탈로그를 제작해 그중 5만 부는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해 외국으로 보냈다. 이젠 카탈로그에 삽화까지 곁들였고, 심지어 종이에 샘플을 붙여 함께 보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넘쳐나는광고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존재를각인시켰다. 건물들 담벼락이나 신문, 심지어 극장의 커튼에서까지도 그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무레는 여성은 본래 광고에약한 존재이므로, 필연적으로 소문의 진원지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공언했다. 게다가 이제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학자처럼, 여성에게 좀 더 높은 차원의 덫을 놓았다. 여성이 값싼 물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면서 필요 없는 상품을 구매한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 P395

무엇보다 백화점 내부 배치에 관한 무레의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어느 한 구석도 한가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했다. 어느 한군데도 빠짐없이 모든 곳에서, 북적거림과 몰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삶은 또 다른 삶을 끌어당기고, 새로운 욕구를 잉태하며, 그 욕구를 빠르게 전파시키기 때문이다. 무레는 그러한 법칙에 근거해 온갖 종류의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 P395

"그래, 여전히 사는 게 즐겁나?"
무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예전에 삶의 공허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의미한 고통에 대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난 여태 지금처럼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네.
오! 이보게 친구, 날 비웃지 말게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 순간조차 더없이 소중한 거니까 말일세!"
그는 눈물이 덜 닦인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면서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P536

"그럴지도! 난 나 자신이 무언가에 현혹되기를 바란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거라면, 지루해서 죽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미쳐서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P537

"드니즈의 이러한 시도는 봉 마르셰 백화점의 마르그리트 부시코가 했던 시도를연상시킨다. 백화점 설립자인 부시코는 공동 설립자인 아내의 발의로 1876년 7월31일 직원들을 위한 공제조합을 만들었다. 그에 앞서 1872년에는 직원용 도서관을 열었으며, 음악과 펜싱 수업, 외국어 강좌를 개설했다.
- P592

허참! 우리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는지. 새파란 어린 것 하나 때문에 늙은이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다니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말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줄지어 도산하는 광경이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게다가 앞으로도 문닫을 가게들이 줄을 서 있단 말이지. 그 작자들이 백화점에다꽃, 모자, 향수 그리고 신발 매장까지 낼 거라면서? 또 앞으로뭐가 더 생겨날지 그걸 누가 알겠나?  - P616

복잡한 관현악법으로 연주되는 대가의 푸가가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끊임없이 더 높은 곳으로 영혼을 날아오르게 하는 듯했다. 오직 백색들만이존재했지만 결코 똑같은 백색이 아니었다. 백색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거나 대립하고,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면서 빛과 같은광채를 뿜어냈다. 처음에는 캘리코와 리넨의 무광 백색, 플란넬과 나사의 은은한 백색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벨벳, 실크, 새틴과 함께 단계가 차츰 올라가면서 백색이 조금씩 불타오르다가는 주름진 천의 가장자리에 이르러 불꽃이 점차 잦아들었다.
- P660

그가 창조해낸 것들은 새로운 종교를 일으켰다. 그의 백화점은 흔들리는 믿음으로 인해 신도들이 점차 빠져나간교회 대신, 비어 있는 그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인들은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의 백화점을 찾았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예배당에서 보냈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그곳에서 죽여나갔다. 백화점은 불안정한 열정의 유용한 배출구이자, 신과 남편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며, 아름다움의 신이 존재하는 내세에 대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숭배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곳이었다. 그가 백화점 문을 닫는다면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해실과 제단을박탈당한 독실한 신자들이 절망적으로 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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