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그이게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를 미치광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최악의 연기로 무대에 서 있다는 걸 매 순간 의식했다. 예전에는 연기할 때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훌륭한 연기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는 온갖 생각을 했고, 거침없고활력 넘치던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그런 것들을 생각으로 통제해보려 했는데, 오히려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 P10

무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작신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자신이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작되는 순간의 해방감과 진짜 그 인물이 되는 순간을 기다렸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자신이 연기하는 바로 그 인물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대신 완전히텅 빈 채,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를 때나 할 법한 연기를 하면서 무대에 서 있었다. 그는 온전히 쏟아내지도 못했고, 자제하지도 못했다. 그의 연기에는 유려함도 없었고 절제도 없었다. - P12

자신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에 그가 매료된 것은 서너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연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는 목청만 높이지만, 그는 주의 깊게 듣고 집중하는 힘을 활용했다. 무대 밖에서도 그의 그런 능력은 힘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젊었을 때,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그녀들만의 이야기와 목소리,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그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여자들과 상대할 때 그랬다. 그 여자들은 액슬러와 함께 여배우가 되었고, 자신들의 인생에서 여주인공이 되었다.  - P12

그는 케네디 센터에서 푸로스퍼로와 맥베스 를 연기해달라는요청을 받았다. 두 편에 동시에 출연하다니, 이보다 더 대단한 기회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는 두 배역 모두 실패하고 말았는데, 특히 맥베스 역이 심했다. 그는 별로 격하지 않은 셰익스피어 작품도 잘해내지 못했고, 대단히 격한 셰익스피어 작품도 잘해내지 못했다. 평생 셰익스피어 작품을 해왔는데도, 그가 연기한 맥베스는 우스꽝스러웠고, 그의 연기를 본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으며, 보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까지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 사람들은 날 모욕하러 굳이 극장까지올 필요도 없는 거야." 그는 말했다.  - P13

무너져내리는 인물을 연기할 때 거기엔 체계와 질서가 있다.
그러나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지켜보는 건, 자신의 종말을 연기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일이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이 푸로스퍼로 혹은맥베스라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했듯 자신이 미쳤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미치광이로서도 가짜였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 P14

 아침마다 그는 몇 시간씩 침대에 숨어 있곤 했는데, 그런 역할에서 숨는다기보다는 단순히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자살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 P15

한편 푸로스퍼로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는데, 아마도 아주 최근에 그가 완전히 망친 대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찌나 자주 되풀이되었던지, 완곡한 의미조차 없고 어떤 실재도 가리키지 않았음에도 그 대사는 얼마지나지 않아 개인적인 의미가 충만한 주문 같은 힘을 지닌 아우성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잔치는 다 끝났다. 말한 대로 이배우들은 모두 정령이었다. 이제 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혼란스럽게 되풀이되는 "흔적도없이"라는 두 마디를 머릿속에서 도통 몰아내지 못한 채 아침 내내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었고, 그 두 마디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뭔가 모호한 비난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의 복잡한전인격全人格이 "흔적도 없이" 라는 말에 완전히 휘둘렸다.
- P16

지금 무엇이 그의 자신감을 파괴해버린 걸까? 그는 이 병실에서뭘 하고 있는 걸까? 전에는 존재한 적 없는 자기 희화화가 생겨났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기 희화화, 그가 바로 자기 희화화자체인 이런 일이 어쩌다 일어났을까? 그저 흐르는 세월이 가져다준 쇠퇴와 몰락일 뿐인 걸까? 그저 노화의 징후일까?  - P19

파 박사는 매주 두 번있는 면담 시간에 액슬러에게, 박사 자신이 "보편적인 악몽"이라고 묘사한 증세가 갑자기 나타나기 이전에 액슬러의 삶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되짚어보라고 했다. "보편적인 악몽" 이라는 말은 곧, 이 배우가 극장에서 겪은 불운이, 즉 무대에 서긴 했으나연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실패에 충격을 받은 일이사이먼 액슬러처럼 전문 배우가 아닌 꽤 많은 사람들도 꾸는 스스로에 대한 뒤숭숭한 꿈의 내용이라는 의미였다. 무대에 서긴했으나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모든 환자가 한 번쯤은털어놓는 흔해빠진 꿈의 유형에 속했다. 그런 꿈과,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의 대로를 알몸으로 걷는 꿈, 혹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는데 준비를 전혀 못한 꿈, 혹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 - P20

고통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기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설사 그 설명이 무엇 하나해명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또하나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알더라도.
- P21

몇몇은 자살을 시도했을 때 자신을 엄습한 느낌이 사이코패스가살인을 저지를 때 느낄 법한 쾌감과 유사했다고 묘사했다. 한 젊은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한테도 주변 모든 사람한테도무기력하고 완전히 무능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세상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하기 어려운 걸 실행하기로 마음먹을 수있어요. 그게 기분을 돋워주죠. 기운나게 해주고요. 행복감도 느끼게 해줘요."  - P23

 "자살은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창작한 역할이에요." 그는 말했다. "우리는 그 글 안에 존재하면서 그 역을 연기하는 겁니다.
모든 게 신중하게 연출되지요. 자기 시신이 어디서 발견될 것인가, 어떻게 발견될 것인가." 그런 다음 덧붙였다. 단, 공연은 한번만 가능합니다."
- P24

"이보게." 제리는 말했다. "누구나 못하겠다‘는 느낌이 어떤건지 알고, 자신이 엉터리라는 게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어떤 건지도 알아. 배우라면 다들 느끼는 공포감이야. 사람들이알아채고 말았어. 들켰어. 까놓고 말해 나이가 들면 한 번쯤 패닉에 빠지는 게 사실이네. 난 자네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여러해 동안 그런 문제를 겪어왔네. 그중 하나가 갈수록 느려진다는걸세. 모든 면에서, 읽는 것조차 느려지지. 내가 지금 뭔가를 빠르게 읽는다면 아주 많은 부분을 기억 못할 걸세. 말하는 속도도느려지고 기억력도 느려지지.  - P45

장서에 둘러싸인 채 그는 그곳에 앉아, 등장인물이 자살하는 희곡들을 떠올려보았다. 「헤다 가블러의 헤다. ‘영애令愛 줄리‘의줄리, ‘히폴리투스‘의 파이드라, ‘오이디푸스 왕‘의 요카스테,
안티고네 의 거의 모든 인물들,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모두가 나의 아들의 조 켈러, 얼음장수 오다의 돈 패릿.
「우리 타운」의 사이먼 스팀슨, 「햄릿」의 오필리아, 오셀로의 오셀로, 「줄리어스 시저」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리어 왕의 고너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안토니, 클레오파트라, 이노바부스, 차미언, 「깨어나 노래하라!」의 할아버지, 「이바노프의 이바노프, 「갈매기」의 콘스탄틴, 이 놀라운 목록은 한때 그가 연기했던 작품들만 꼽은 것이었다. 더 많았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
- P48

 자살은 기원전 5세기 이래로 극작가들이 경외감을 가지고 숙고해온 주제다. 이 대단히 예외적인 행위를 고취할 수 있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매혹되어온 주제이기도 하고, 그는 이 작품들을 억지로라도 다시읽어봐야 한다. 그래, 소름끼치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한다. 그 누구도 그가 이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없도록.
- P49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던 일을떠올렸다. 그처럼 집중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은 오랜만에 연기를 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건 어쩌면 그가 회복되는 데도 도움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는 그녀를, 그녀가 했던 이야기를, 그녀가 남편을죽여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기억했다.  - P51

영화에서는 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니지만, 그런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관객의 99.9퍼센트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그것도 없애버리고 싶어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 정도로 어렵다면, 상상해보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성공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 P52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무적의 분위기를 풍겼고, 비록 원형은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였지만, 배우인 어머니의 발성법을 본받기라도 한 듯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억양으로 말했다.
- P59

우린 늘 캠핑과 하이킹을 갔어요. 심지어 눈이 오는 날씨에도요. 매년 여름이면 알래스카 같은 데로 떠나 하이킹과 캠핑을 했죠. 재밌었어요. 뉴질랜드에도 가고 말레이시아에도 갔어요. 대담하게 전 세계를 함께 돌아다니는 게 난정말 좋았지만, 그런 우리에겐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어요. 우린 두 명의 도망자 같았어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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