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병원은 편안하고 즐겁고 품위 있는 장소이자, 정신적인 자극제가 되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심각한 문제들이 곳곳에 깔렸던 지방 도시의 저주받은 시간이 유쾌하게 흘러갔다.
- P12

종종 두오모 성당의 남쪽 측면이나 트라발리오 광장 또는 가리발디 거리에 줄지어 늘어선 장신구나 당과류를파는 노점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가판에 진열된 싸구려 물건들을 잠자코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어쨌든 파디가티가 가장 빈번하게 지나다닌 곳은 산로마노 거리의 비좁고 혼잡한 인도였다. 튀긴 생선과 살라미, 포도주, 싸구려 옷감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가 가득하고 무엇보다 평범한 여인데, 군인, 청년, 망토를 걸친 농부들로 붐비는 그곳의 낮은주랑 아래서 생기 있고 쾌활하고 기쁨에 찬 눈빛을 반짝이며얼굴 한가득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를 보는 일은 놀랍기만했다.
- P15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과 같았다.
- P20

음악 애호가와는 거리가 먼 우리의 착한 스포츠맨들(바그너라는 이름만 들어도 슬픔의 바다에 잠길 지경이다!)은 얌전히 앉아 그날 오후 피렌체 시립 극장에서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파디가티의 열정 가득한 감상을 경청했다. 파디가티는 오페라의 음악과 "독일인 마에스트로의 훌륭한 해석에 대해, 그리고특히 그가 "그저 사랑의 긴 탄식이었으니"라고 평한 오페라의제2막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미 덤불의 꽃가지에 완전히 둘러싸인 작은 벤치, 다시 말해 명백하게 신방을 상징하는 자리에 앉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죽음과도 같은 영원한 쾌락의 밤으로 빠져들기 직전에 부른 사십오 분간의 아리아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파디가티는 안경 너머의 눈을 반쯤 감은 채 황홀하게 미소지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그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따금 낭패스럽다는 눈길을 은밀하게 주고받았을 뿐.
- P22

새벽 서너 시쯤, 파디가티의 아파트에서는 덧문을 통해 직은 불빛이 매일같이 새어나왔다. 두오모 성당의 보일락 말락아찔한 처마 위에 늘어서 앉은 올빼미들의 기이한 탄식만이정적을 깨는 골목길에서 천상의 음악이 희미한 선율로 날이올랐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그중에서도 바그너의음악이 그 결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가장 제격이었으리라. 그 시간 고르가델로 거리를 흥청거리며 마지막으로 지나는 밤의 방랑자도 교통경찰 만세르비지나 수위 트라폴리니,
또는 전 축구 선수 바우시가 바로 그 순간 의사의 손님으로와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 P25

포 강 평야의 12월 아침, 그러니까 볼로냐 대학의 학생이었던 우리가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떠야 했던 그 캄캄한 아침을떠올리면 아직도 한기가 느껴진다. 카보우르 대로의 세관 장벽 쪽으로 덜커덩거리며 맹렬하게 달리는 전차에 올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었다. 위협하는 듯한 소리였다. "서둘러, 이제 출발할거야!" 아니면 "얘들아, 서둘러봤자 소용없어. 난 이미 떠났으니까!" 어쨌든 운전사 옆에 붙어서 속도를 내라 재촉하는 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었다. 바로 그해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 P27

순간적인 방심으로 그는 큰 대가를 치른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조롱이었던 것 같다.
- P45

순진하기로 유명한 나의 아버지는 물이 발등에 차오르기전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도통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변호사님!" 아버지가 소리쳤다. "누가 왔는지 보세요!"
라베촐리 부인은 남편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끼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식탁보에서 눈을 거두고는파디가티에게 황급히 손등을 내밀었다.
"아, 네… 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 P66

"여기는 다르지요." 파디가티가 열정적인 기세로 대꾸했다. "아무리 더운 밤이라도 여기서는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0그러고서 그는 이탈리아의 다른 해안들과 비교해 아드리아 해안이 가진 좋은 점들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털어놓았듯이) 베네치아 출신이었고 베네치아의 리도 섬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그의 판단은 어쩌면 편견에 치우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드리아 해는 그에게 서쪽 티레니아 해보다 훨씬 더 마음이 평온해지는 바다인 것 같았다.
- P68

삼십 분 전의 흐릿하고 칙칙한 물빛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망망대해에서 불어오는 세찬바람과 거의 절정에 달한 태양이 바다를 황금 가루가 듬뿍 뿌려진 광활한 푸른빛으로 바꾸어놓았다. 일찌감치 수영을 하러나온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라베촐리네 세아이도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한 뒤 수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숙소로 갔다.
"그럴 수 있지요." 파디가티가 거듭 말했다. "하지만 친애하는 라베촐리 부인, 태양이 ‘산마리노의 하늘빛 시야 뒤편으로지기 시작할 때, 이곳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그런 오후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 P69

점심을 마치자마자 나는 곧장 혼자서 해변으로 돌아왔다.
나는 천막 아래에 앉았다. 바다는 이미 검푸른색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연안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부터 보이지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그날 파도의 머리는 눈보다더 새하얀 깃털을 나부꼈다. 바람은 언제나 바다에서 불어왔지만, 지금은 가볍게 역풍이 불었다. 아버지의 군용 쌍안경을통해 오른쪽 물굽이의 포물선이 끝나는 푼타디페사로의 돌출부를 응시했다. 소나무 줄기가 머리털을 거칠게 헝클어뜨리며휘청거리는 풍경이 보였다. 이른바 오후의 그리스 바람에 떠밀린 길고 높은 파도들이 잇따라 촘촘한 대열을 이루며 전진했다. 높이 솟은 물거품의 깃털이 아래로 치닫고 마지막 몇 미터 안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파도는 마치 육지를공격하러 몰려드는 것 같았다.  - P76

기사의 주제는 아주 오래되고 매우 고질적인 유대인 문제‘
였다. 제멜리 신부의 진술에 따르면, 거의 이천 년 동안 세계곳곳에서 자행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반복적인 박해는 하늘의 분노를 암시한다고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맺는다고 했다. "심장이움찔할진대,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될 수 있을까? 알다시피, 온갖 폭력적인 생각에서부터 신의 의지가 분명하게 표출된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한 심판에 이르기까지 …..…."
- P82

 나는 불현듯 그가 치유할 수 없는 끝없는 고독에 방치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델릴리에르스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데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나는 선생님을 기만하지 않았어. 그를 배신하고 이용하려는 자와 놀아나지 않고 그 유혹을 뿌리침으로써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이나마 지킬 수 있었어.
내가 파라솔에 이르기 직전에 파디가티가 몸을 돌렸다.
"아, 너구나." 그는 별로 놀란 기색 없이 말했다. "나를 보러와줘서 고맙구나."
- P86

그것은 행간에 번역이 달린 학습판 『일리아스』 제1권이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전히 낭독했다. "그게 여행 가방에 있더군."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그때 도착했다. 어머니는 파니의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 팔을 들고는 우리 가족끼리의 신호를, 그러니까 슈베르트 가곡의 첫 소절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 P87

파디가티는 돌아보더니 누워 있던 긴 의자에서 몸을 반쯤일으키고는 정중하게 파나마 모자를 들어올렸다. 부모님은 동시에 응답했다. 어머니는 머리를 한 번 까딱거렸고, 아버지는새로 산 새하얀 캔버스 모자의 챙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내가 피디가디와 같이 있는 것을 두 분이 벌로 딜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곧장 알 수 있었다. 파니는 나를 보자마자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나에게 가도 되는지 물었을 텐데, 어머니는 만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P87

시내 깊숙이 갈색 지붕들 위로 저 멀리 높이 솟은 데스테 성과 두오모 성당…… 어머니의 품 같은…내 도시의 오래된 얼굴을 되찾고 온전히 나를 위해 다시 한번그 얼굴을 돌아보니, 최근 내게 고통을 안겨주던 그 잔인한 소외감을 순식간에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박해와 학살의 미래(이것이 우리 유대인에게 언제든 가능한 만일의 사태라는 소리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줄곧들어왔다)가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누가 알겠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 수 있겠어?‘
하지만 이 모든 희망과 환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 P103

그들, 이교도들은 칠팔십 년 전에야 마침내 우리가 벗어났던참담한 중세 구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다 또다시 우리를떼거리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겁먹은 많은 짐승들처럼 철책 뒤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거기서 절대 탈출할 수없을 것이다.
- P112

니노가 한 말을 고맙게 여겨야 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그가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그의 말, 특히 목소리에서 느껴지는절망적인 어조가 유발하는 불쾌감을 간신히 숨길 수 있었다.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거야‘라니, 이보다 더 어설프고무감각하고 우둔한 이교도가 또 있을까?
- P112

나는 곧 그가 개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니까, 이제 날 조용히 혼자 둘래, 어쩔래?"
그는 위협하듯 손가락을 올리며 짐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흰색 바탕에 갈색 얼룩이 있는 중간 크기의 잡종 암캐는애가 타는 촉촉한 눈으로 꼬리를 절망적으로 흔들어대며 아래서 그를 성가시게 했다. 자갈 위에서 의사의 신발을 향해 몸을 질질 끌고 가는가 하면, 완전히 그에게 복종하여 잠시 배와다리를 허공에 내놓고 뒤로 벌렁 눕기도 했다.
- P120

"몸이 홀쭉해졌구나, 알고 있니?" 그가 말했다. "하지만 잘어울려, 훨씬 남자다워 보이는군. 그런데 말이지, 살아가다보면 고작 몇 달 만에 인생이 큰 변화를 맞기도 하는 법이야. 때로는 수많은 세월보다 그 몇 달이 더 중요할 수 있지."
- P120

그 안개의 바다에서 냄새로 우리를 뒤쫓아왔다는 것에 기뻐하며, 개는 멈춰 섰다. 녀석은 길고 부드러운 귀를 뒤로 젖힌 채 컹컹 짖고 꼬리를 유쾌하게 흔들면서, 무엇보다도 파디가티를 향한 그 애처로운 충성의 표시를 또다시 반복했다.
"선생님 개예요?" 내가 물었다.
"무슨! 오늘 저녁 아궤도토 부근에서 발견했어. 쓰다듬어줬는데, 그걸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나봐. 이런! 그때부터 녀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어."
- P122

"이 몹쓸 것아! 네 새끼들은 어디에 뒀니? 이 시간에 길거리를 쏘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어? 이런 비정한 어미가 있나!"
개는 파디가티의 발에서 조금 떨어져 땅에 배를 대고 납작엎드렸다. ‘날 때려요, 원한다면 어서 죽여요.‘ 이렇게 말하는것 같았다. 당연히 그래야죠. 게다가 내게도 그게 나아요!‘
의사는 몸을 굽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짐승은 벌컥진심 어린 격정에 휩싸여 그의 손을 정신없이 핥았다. 돌연히위로 뛰어올라 순식간에 입맞춤하며 얼굴까지 핥으려고 했다.
"진정해, 진정해……" 파디가티가 거듭해서 타일렀다.

- P123

"저것 좀 봐!" 그가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처럼 자신의본성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도 다분히 동물성이 존재하는데, 과연 인간이 복종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것을, 단지 한 마리의 동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P123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거야" - P124

나는 잠자코 있었다. 델릴리에르스와 파디가티를 생각했다.
한 명은 가해자, 다른 한 명은 피해자. 보통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파디가티는 나를 잘못 봤다. 증오가 아닌 그 어떤 다른 것으로는, 나는 결코증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 P125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삭막한 복도에영영 추방되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친구들이있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 학생은, 벌칙을 면했을뿐 아니라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고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가 그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옳지 못한 걸까? 나에겐, 그렇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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