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과 현수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정도로 급작스럽게, 거의 저돌적으로 그들에게 빠져든 건 당시 내가 인생에서 더이상 건질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몰입해 있었기때문일지 모르겠다. 나는 회의로 가득차 있었고, 어디에서든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란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희망은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는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 P11

나는 학부 졸업 후 어쩌다가 입사하게 된 승마전문 잡지사에서 일하며 조금씩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구글을 검색해 무료로 쓸 수 있는 말 사진들을 찾는 게 전부였다. 캡션에 적힌 말의 품종이 사진속 말의 품종과 같은지 수도 없이 확인해야 했는데, 말의 품종에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던 나는 혹시라도 잘못된 이름을 적어넣을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나중에는 구약을 방불케 하는 말의 계보를 거의 외울 지경이 되긴 했지만(트라케너는 홀스타인을 낳고,홀슈타인은 비엘코플스키를 낳고.....) - P60

해원과 나는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침묵한 채 기다렸고, 그리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 P102

은주와 나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실은 거의 경쟁적으로 지난 연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아예 날을 잡아서 연보를 읊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날 때마다 얘기를 하다보니 거의 그렇게 한 셈이 되었다. "네가 워커힐에서 한바탕하고 헤어졌다던 게C였나? 그다음엔 누구였더라?" 나는 은주가 고등학생 때 처음아하게 된 한 학년 위의 선배부터, 대학 때 소개팅으로 만난 명문대 공과생을 거쳐, 여기저기서 어찌저찌 알게 된 몇 명의 시시한남자들그리고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오다가 나를 만나기 직전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강렬한 무력감과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한 다섯 살 연상의 법조계 종사자까지 그녀의 연애사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어느 정도 섭렵할 수 있었다. - P122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닮은 점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주요한 건모든 사안에 냉소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고작 십대 후반이었지만 마치 세상을 다 경험해본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비웃곤했다. 몰지각한 사람들, 몰취향인 사람들, 부주의한 사람들, 부도덕한 사람들, 가벼운 사람들, 지루한 사람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그녀의 냉소가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안온하게 자랐다는 나름의 자격지심으로 인한 자기비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반대로 무언가를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피해의식으로 인한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냉소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둘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닮은 점이 많다고 여기곤 했다.  - P133

내가 대체 연희의 어떤 면에 그렇게 끌렸었나 돌이켜보면, 아마도 삶에 대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제대로 살고 싶어,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건 제대로 된삶을 살고 싶다는 말과는 조금 달랐다.
"제대로 사는 게 뭔데?"
물어보면 연희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조금 고민이 되는지 시간을 끌다가 대답했다.
"부끄럽지 않게." - P137

한겨울의 강바람을 뚫고 동작대교를 건넌 직후 따뜻한 건물 안에들어와 노곤해진데다가 방금 전까지 겪었던 무자비한 추위로 인해 약간의 마조히즘적인 조증까지 겹쳐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심지어 내가 혐오하기를 마지않았던) 짓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옆 테이블에서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던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저기, 우리랑 같이 놀래요?‘ 하는 식으로 말을 건넨 건 아니고 그저 불쌍한 내 친구에게 위로의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들은 당연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고(그곳은 내가 살던 주택가에 있는 프랜차이즈 호프집이었고 결코 그런 식으로 말을 걸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었다) 나 또한 곧바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사색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철회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그녀들은 우리에게 헛소리 말고 꺼지라고 해주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죠."
-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